목사님 모친상, 방송해야 될지 말이 많았어유
목사님 모친상, 방송해야 될지 말이 많았어유
  • 남광현
  • 승인 2024.04.19 2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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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경험하는 일들 중 아직도 특별하게 여겨지는 하나는 고향에 대한 이해이다. 태어나서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타지에 나가 일생을 보내다가 마을로 들어와도 그 분들은 고향사람이다. 반면, 30년 넘게 마을에 들어와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외지 사람으로 정리되는 모습이 필자에게는 아이러니다.

“000씨가 오늘 아침 숙환으로 별세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장례식장은 00장례식장이고, 발인 후 마을에 들러 노제를 지낸다고 하니 마을 분들은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이장님의 방송이 이른 아침부터 동네를 쩌렁 쩌렁 울려댄다.

“장로님, 이장님 방송 들으셨지요? 제가 돌아가신 분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 마을 어디에 사시던 분이세요?”

“목사님, 아마도 목사님은 모르실거예유. 마을 떠난 지가 오래되유. 서울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마을에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내려왔었어유. 지금은 아무도 안살어유, 그래도 00네 하고는 일가라서유 장례식장은 가보려고해유.”

교우 가정의 일가라고 해서 조문을 가보니 마을 토박이 분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 교우들도 있었다.

“아니, 목사님 오셨네요.”

“예, 집사님. 먼저 와 계셨네요.”

“우리 목사님도 오셨네유, 어떻게 오셨대유.”

“예, 권사님. 오시는 줄 알았다면 교회에서 함께 모시고 올 걸 그랬습니다.”

“아니요, 저희들은 여기를 지켜줘야 해서 좀 늦게까지 있어야 해요.”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가 전혀 모르시는 분이예요?”

“목사님은 당연히 모르시지유, 저희하고 함께 자랐지유, 초등학교 마쳤나, 아마 못 마쳤을 거유, 타지로 나가 고생 많이 했어유. 살만 하니까 이렇게 되네유. 평생 고생해서 그렇지유 뭐. 그래도 애들 말 들어보니까 서울에서 신앙생활은 했다고 하네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을 분들과도 눈인사를 나누며 드는 생각은 여전했다. 마을 떠난 지 수십 년이 되었어도 마을 출신으로 인정해 주는, 그래서 고인의 마지막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 도리하고 생각하는 어촌 사람들의 고향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정말 특별하다.

교회에서 남선교회 모임을 갖게 되었을 때, 장로님을 비롯해서 회원들 모두가 필자를 위한다고 한마디씩 거들었던 말들이 생각난다.

“목사님, 어머님 천국으로 모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유.”

“장로님, 감사했습니다. 먼 거리임에도 교우 분들 모두 함께 해 주시고 예배 인도해 주셔서 유족들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아직도 실감이 안 나시지요?. 저도 부모님 보내드렸을 때, 한 동안 믿겨지지가 안더라고요. 시간이 필요하실 겁니다.”

“예, 권사님. 아직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임종 전에 가족들 모두 축복해 주시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마지막 인사 주시고 편히 소천 하셔서요.”

“목사님, 아버님, 살피셔야 해요. 노년에 이별하는 충격이 정말 크다고 해요.”

“예, 집사님.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께서 많이 힘들어 하시네요. 경험이 있으신 분들께서 똑같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목사님께 말씀드립니다만, 목사님 상 당하셨을 때, 우덜이 이장한테 말해서 마을에 방송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 많이 했어유.”

“장로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됐는데, 거기까지 신경을 쓰셨군요.”

“그럼유, 그런데 저희들이 결론 내리기를 마을 사람들이 오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방송은 하지말자고 했구먼유. 그래도 소식들은 마을 사람들은 죄다 봉투 만들어서 갖다 줬구먼유.”

어촌의 고향 사람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어촌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는 필자만의 생각이자 이해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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