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캠벨,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
한국을 사랑한 캠벨,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
  • 송양현
  • 승인 2023.06.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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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기념사업회는 8일 오후 배화여대 캠벨홀에서 조세핀 필 캠벨의 평전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신앙과지성사)”를 출간하고 출판기념예배를 가졌다.

감사예배는 홍용표 목사(자교교회)의 사회, 차재일 목사(광희문교회)의 기도, 최이우 원로목사(종교교회 원로)의 설교, 김진홍 목사(수표교교회)의 축도 등 캠벨이 세운 교회의 현 담임자들이 순서를 맡아 진행했다. 최이우 원로목사는 설교를 통해 지난 2020년 캠벨 소천 10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회 준비를 시작으로 ‘캠벨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며, “캠벨의 유산을 이어가려면 그 소중한 가치를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과 유산을 선하게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병식 목사(배화여자대학교 교목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출판기념회는 배화여자대학교 이사장인 이현식 목사의 환영사, 경과보고, 저자의 지도교수인 이덕주 교수의 서평, 저자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배화여자대학교 이사장인 이현식 목사는 먼저 “우리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보물과도 같은 훌륭한 책을 안겨주셨다”며 저자와 캠벨기념사업회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이 책은 치밀하고 섬세한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수준 높은 학문적 고민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포근한 문체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이덕주 교수는 서평에서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 대부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됐는데 권지영 목사의 수고로 비로소 캠벨 선교사의 생애와 사역의 전모가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이 책을 지은 젊은 여성사학자 권지영 목사는 “그녀의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시점은 남편과 두 아이를 잃은 뒤였다. 가족을 잃은 빈손을 한탄하며 자책하거나 주저않지 않고, 그 빈손으로 넘어진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기 시작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한편, 이 책은 캠벨 선교사의 생애를 따라간다. 그가 선교사가 되기까지의 과정, 중국선교사로서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펼쳤던 캠벨의 사역, 한국선교를 결정하기 까지의 과정과 내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 그리고 별세하기까지의 과정을 300여 페이지에 담아냈다. 지은이 권지영 목사는 한양대학교에서 사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M.Div)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논문으로 「캠벨 부인의 선교와 신학에 관한 연구」를 썼다. 현재 감신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조세핀 필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1920)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
1874년, 21세때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
1880년 남편 캠벨 목사와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음.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은 후,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봉직.
1897년 10월 9일(45세) 미국 ‘남감리회해외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
한국에 도착한 후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함. 1903년 12월 윤치호에 의해 ‘배화학당’으로 정식 개칭.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함.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1901년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Chapel)’이라 함.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음.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함.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고,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20년 11월 12일 별세.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 양화진 제1묘역(나-7)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음.

캠벨평전 출판기념회 경과보고(후기) 20230608

캠벨 선교사가 하나님께 드린 ‘빈손’이 가닿았고, 그 헌신의 발길이 머물렀던 조선 선교 사역지는 주로 학교와 교회 그리고 병원이었습니다. 학교로서는 배화학당(현 배화학원), 교회는 종교교회, 자교교회, 수표교교회, 광희문교회, 석교교회가 있고 의료기관으로서는 세브란스 병원이 있습니다. 한동안 캠벨 선교사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기리고자 했던 노력은 주로 배화학원과 종교교회 그리고 자교교회가 어우러져 함께 했던 추모 행사 위주로 ‘기억과 감사의 의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기념의 의식(儀式, ritual)을 치르는 것만으로는 ‘기억의 감사’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던 때, 2020년 소천 10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회 준비를 시작으로 당시 종교교회 담임이었던 최이우 목사님의 주도로 ‘캠벨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습니다. 기념사업회의 논의에 따라 2020년 11월 12일 배화여자대학교 캠벨홀에서 기념 학술제를 열었고 캠벨 선교사 묘역에 기념 동판을 설치하였으며, 11월 15일 주일 오후 5시에 종교교회에서 ‘서거 100주기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이후 기념사업회의 활동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캠벨장학회’의 운영과 캠벨 선교사님의 전기를 출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캠벨 선교사님의 전기는 평전(評傳)의 형식으로 출판하기로 하고, 권지영 목사에게 집필을 이덕주 교수에게 내용 감수를 전병식 목사에게 편집체제에 대한 감수를 맡게 하였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과 자부심으로 스승 이덕주 교수와 제자 권지영 목사가 쉼 없이 밀어붙인 합력(合力)의 결과는, 오늘 2023년 6월 8일 캠벨 선교사님의 평전,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를 출판하여 기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책을 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시기임에도 ‘신앙과지성사’의 대표인 최병천 장로의 도움과 격려로 평전이 출간되었음을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기억과 기념,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기록은 기억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전달하고 기억하는 일에 기운을 일으켜 새로운 기적의 기세를 일으킵니다. 모쪼록 이 평전이 캠벨 선교사님의 헌신을 기념하면서 선교사님의 선교 활동을 계승하여 세상 곳곳에 또 다시 펼쳐지는 캠벨 후예(後裔)의 선교에 활력을 제공하는 기적의 기록이 되기를 바라며 경과보고를 마칩니다.

2023년 6월8일 배화여자대학교 전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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