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5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45
  • 안양준
  • 승인 2023.05.24 0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해와 배교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당연히 수신인은 히브리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유대인 기독교도들이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불려지며, ‘사랑장’(고전 13:), ‘부활장’(고전 15:)과 함께 많은 그리스도인이 애호하는 말씀이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

‘믿음장’ 중에서도 위의 말씀은 무언가 더 결연한 자세를 갖게 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믿음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난, 심지어 죽음까지….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며 지금까지 한 개인의 종말로서 죽음에 대해 보았지만 이제 신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박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2)

사도행전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와 야고보 사도의 순교 이후 산발적인 고난은 있었어도 또다른 순교자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는 엄청난 박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고난의 큰 싸움’에 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AD 64년 로마의 네로 황제가 집권하던 당시 대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곱 개 언덕에 100만 인구가 밀집된 도시 로마에서 일어난 화재는 마침 지중해로부터 불어온 남서풍으로 인해 9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불길이 잡혔고, 14개 행정구 중 3개 행정구가 전소되고 7개 행정구가 반소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재건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문제는 전소 지역이 네로가 발표했던 도시계획 예정지와 거의 일치하다는 이유로 시민들이 화재의 원인으로 네로 황제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적개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왜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지목했을까? 

로마는 다신교이기에 타종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문제는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이 칼리굴라 황제 시절 황제를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강하게 반발하였는데 칼리굴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상황이 종료되었고 이후 유대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점은 유대교는 선민의식 때문에 자신의 종교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포교에 지나치게 열성적이다. 다른 신에 대해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전도에 열심인 기독교는 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위험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에 기독교는 미약하였지만 사회 질서를 혼란케 할 잠재 요소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네로는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지목하며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라는 항목을 추가하였다. 체포 후 재판을 거쳐 처형하는 로마법조차 무시되었다. 기독교도를 단순히 처형한 것이 아니라 경기장에 모인 관중의 구경거리로 제공하였는데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씌워 들개 떼에 물려죽게 하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산 채로 불을 붙여 어두운 밤에도 모든 이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네로의 박해가 있은 후 히브리서가 쓰여졌다. 이방인 성도수가 증가함에 따른 문화적 충돌도 발생하였을 것이고, 오랜 습관인 제사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인한 일종의 상실감도 느꼈을 것이다.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생겨났고,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인해 동족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네로의 박해 이후 두려움을 갖게 된 자들이 유대교로 되돌아가 ‘합법’의 울타리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향해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때 있을 대환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마 24:21-22)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고,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셨다.

요한계시록은 ‘짐승의 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 13:17)

이 표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오른손에나 이마에 받게 한다고 예언하고 있으며,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수며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고 하였다.

마지막 때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은 경제적인 부분을 통해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문제가 그 어떤 어려움보다 크게 다가올 것이다.

당연히 자신에게 닥칠 환난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고 배교의 길을 걷게 될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생각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존 스토트는 “십자가 상에서 홀로 외롭게 고통과 아픔을 겪으신 예수님 곧 온몸에는 상처투성이 뿐이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 있고 등에는 태장을 맞은 자국이 있으며, 머리에는 가시관을 써 이마로부터 피가 흐르며, 옆구리는 창으로 찔려 있고, 입은 목말라 타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절규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것,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는 것, 어떻게 주님이 그럴 수 있는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기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내게 다가올 고난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좀더 편한 길을 가고자 하는 유혹이 찾아올 때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길을 늘 마음에 두고 묵묵히 이겨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