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정신과 기독교
5·18 정신과 기독교
  • KMC뉴스
  • 승인 2023.05.2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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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꽃피는 그의 날에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 넘치리라”(시편 72:7)
추모탑(국립 518민주 묘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몇 년 전 이맘때쯤 ‘5월의 청춘’이라는 드라마를 TV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20대 청춘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였다. 마침 5·18이 다가올 무렵이라 우연히 이 드라마를 시청하다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16부작을 모두 시청하게 되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의 꿈과 사연을 안고 광주에 모이는데, 이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간호사 명희와 대학생 희태의 사랑은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도 아름답게 꽃피지만, 그중 한 명은 끝내 계엄군의 총에 맞은 후 실종되고 말았다. 그녀의 가족과 희태는 40여 년이 지나서야 실종된 시신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비로소 시신을 안치한다.

'5월의 청춘'은 2013년 출간된 '오월의 달리기(김해원 저)'를 원작으로 했다고 한다. 전남 대표 육상 선수로 뽑혀 광주 합숙소에서 전국소년체전을 준비하던 초등학생 명수의 눈에 비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동화이다. 하지만 원작을 각색한 이 드라마는 단순한 역사의 비극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비극을 안고서 하루하루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잊을 수 없는 기억과 회복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실종자의 유해조차 발견하지 못한 슬픈 현실에도 사람들은 하루하루 삶을 헤쳐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5월의 청춘’은 끝나지 않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자 계속되어야 할 이야기이다.

신록의 푸르름으로 시작되는 5월에는 어린이의 날, 어버이의 날, 스승의 날 등 중요한 기념일이 들어 있다. 5월은 앞에서 소개한 드라만 제목처럼 사랑으로 꽃피는 청춘의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달이 시작되면 필자는 기쁨과 감사, 회한과 슬픔, 분노와 동정 등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된다. 마냥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함과 아쉬움이 든다.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5·18민주화운동이라는 큰 사건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채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 여전히 학살자들은 단죄되지 않은 채 지금도 진상규명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실종자의 시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5·18 민주화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 삽입하기로 약속했는데도,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제는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43년이 지났는데도 국민들의 희생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립한 역사적인 사건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으려는 시도도 계속 좌절되고 있다. 역사가 퇴행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5·18 정신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에게 끌려가고 구타당하고 죽어가는 현실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저항했고, 그 댓가는 투옥과 고문과 죽음이었다. 항쟁의 지도부에 섰던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또 산 자들은 투옥과 고문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오랫동안 광주민주화 운동은 학살자들의 시각에서 ‘광주사태’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무시되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의 결실로 이제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게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 정권의 폭압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저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시민이요, 형제 자매들이다. 저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분노하며 일어났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죽음을 무릎쓰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역사의 영웅들이었다.

그러므로 5·18정신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과 맥을 같이 한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데서 출발하지만 이웃과 사회를 떠나서는 허상에 불과하다. 나를 넘어서 너를 보고 또 우리를 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참된 의미이다. 내가 체험한 신비의 의미를 이웃과 사회를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1980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뜨거운 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등부 학생회장으로, 또 학교 기독학생회 임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매일 매일 전력을 다해 신앙에 매진했다. 하지만 신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교회나 주위에서 들은 적이 없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피 흘리고 죽었다는 소식은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에 대해 들었고, 또 외신 기자들이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때 받은 충격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어떻게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나는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알 수 없었을까? 내가 오랫동안 존경하던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광주에서 고난받는 이웃의 문제가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피 흘리고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면서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이런 현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또 알게 되어도 그저 두려워하거나 침묵하기만 할까?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정권이 어떤 정권이든지 나와는 관계가 없고 그저 개인적으로 위로받고 축복받고 천당가면 된다는 식의 신앙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내 이웃이 다치고 죽어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신앙은 너무도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대학 1학년 당시 지극히 보수적이고 온건했던 필자로서는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은 사회역사를 향한 회심의 카이로스였다. 인간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역사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내 주위의 이웃과 공동체,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내게 5·18정신은 그렇게 싹트기 시작했다.

사랑과 자비, 정의와 평화를 본질로 여기는 기독교는 5·18 정신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적극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1: 27)는 숭고한 선언에 토대를 둔다. 이런 고귀한 인간에게 폭력을 통해 침묵을 강요하는 불의한 현실에 맞서 피흘리며 싸운 사람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민주주의가 이만큼 발전한 것에 대해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국민주권,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당연히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계속 가르쳐야 한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단순한 신앙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은 오늘 5·18정신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그날까지 . . .

민주의 문(국립 518 민주 묘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 .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 . .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 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 . .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의 아들이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광주항쟁 당시의 옛 전남도청 앞의 5.18 조형물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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