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3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3
  • 안양준
  • 승인 2023.03.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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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기 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혜를 담고 있는 책이라 알려진 잠언서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마음속 깊이 와닿는 한 편의 기도문을 볼 수 있다. 흔히 ‘아굴의 기도문’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도문과는 또다른 차원의 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야베스의 기도’와 비교해 보아도 조금은 격이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 야베스의 기도가 나에게 복을 달라는 기도, 좀더 구체적으로 지역을 넓혀 달라, 환난을 벗어나게 해 달라, 근심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라고 할 때 아굴의 기도는 훨씬 소탈한, 그럼에도 조금은 더 성숙한 지경에 이른 것 같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굴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솔로몬 당시 활동하던 지혜자로 알려져 있다. 아굴이라는 이름의 뜻은 ‘수집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자신의 이름처럼 많은 잠언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일반 백성에게 가르쳤던 현자였다는 견해가 있다.

잠 30:2-3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라는 아굴의 고백이 있다.

타인에 비해 자신을 짐승이라 말하며 자신은 사람의 총명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비하하는 아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자가 잠언서를 남길만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말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지식이 없다는 표현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지혜와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즉 그가 말하는 지혜와 지식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의 면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신적 지혜를 소유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 점에서 어설픈 지혜와 지식을 갖고 교만하게 자신을 과시하는 자들과 비교할 때 오히려 참된 지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잠 30:4에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라는 질문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자연의 진리에 대해서도 인간은 무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고, 밤이면 어둠이 찾아오는 일상이….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흘러가며,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가 번갈아 1년이라는 시간을 흐르게 하지만, 그렇게 자연은 극히 평범하게 흘러가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그 속에 감춰진 놀라운 질서들을 만들어내시는 존재에 대해 과연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은 인간이 거슬러 올라가서 해답을 얻어낼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굴은 잠 30:5-6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밝히며, 자신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책은 성경이 유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의 경전들이라는 것들은 인간이 자신이 깨달은 작은 지식에 대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를 신격화시킨 것에 불과하며, 또다른 류로 온갖 신들에 대해 말하는 것들이 인간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하며 그 신들이 인간과 비교할 때 그리 대단치 않은 존재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오직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성경의 말씀을 아굴은 순전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순전(純全)이라는 말은 약간의 불순물이나 혼합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하고 완벽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전하는 바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라고 하였다. 방패(旁牌)는 적의 공격 무기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방패라고 할 때 그 역할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본질을 더럽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분명히 책망받아 마땅한 일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닌 것을 더하는 것은 참이 아니라 거짓일 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에 대해 이해할 때 아굴의 기도에 대해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글의 기도가 무엇인가? 아글의 기도는 두 가지이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7-8)

하나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라는 기도이다. 개역성경에는 ‘허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은 자들의 마지막이 그런 것이다. 나름대로 목표를 세우고 애쓰고 노력하였지만 그것이 진정 가치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 그 삶은 헛된 것이요, 허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짓말’이다.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남을 속이는 행위, 그것은 죄를 쌓는 일일 수밖에 없다. 아굴은 그러한 것들을 멀리 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다른 하나는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잠 30:9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는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쉽게 변하는 존재이다. 만약 야베스처럼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응답되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응답해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기 십상이요, 그로 인해 죄악의 길로 달려갈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가난하다고 전제할 때 인간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라면 그러한 것들이 큰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큰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여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물론 아굴의 기도는 무엇을 먹고자 하는 목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방해거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NIV 성경은 “do not refuse me before I die”라고 썼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내가 죽기 전까지 이를 거절하지 마옵소서”라고 할 수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기도한 것이 이뤄지기를, 그리하여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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