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변모 주일과 재의 수요일, 그리고 사순절
산상변모 주일과 재의 수요일, 그리고 사순절
  • 이정순
  • 승인 2023.02.1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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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1520년에 그린 예수님의 산상변모 / 출처: 위키미디어코몬즈 

세계 최고의 성장률을 자랑했던 한국교회를 이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잘 알려져 있듯이, 지난 10여년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급격히 낮아졌다. 이는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 되고 말았다. 가장 최근의 결과는 어떠할까?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지난 2월 16일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를 거치며 10% 가까이 사회적 신뢰도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윤실이 올 1월 전국 19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사회적 신뢰도 결과에 따르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21%,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4%로 집계됐다. 불신한다는 응답은 기윤실이 2008년부터 총 7회에 걸쳐 시행해 온 조사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6차 조사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직전인 2020년 1월에 이루어진 반면 7차 조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갈 시점인 올 1월에 실시되었다. 때문에 7차 조사의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조사에서 목사·교인에 대한 신뢰도 역시 10명 중 2명만이 목회자·교인에게 믿음이 간다고 답했다. 사상 최저치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한국 교회는 언제 비상할 수 있는가?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기 성찰’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2월 19일은 교회력으로 볼 때 ‘산상변모 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된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이 산상변모 주일이 지나고 바로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실천하는 사순절기가 시작된다. 사순절 직전에 변모 주일이 있다는 것이 매우 의미가 크다. 사순절을 시작하기 전 참된 변화,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상변모 주일은 영어로는 ‘Transfiguration Sunday’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왜 흔히 쓰는 ‘Transformation’(변화)이 아니라 잘 쓰지 않는 ‘Transfiguration’(변모)라는 단어를 사용할까 하고 의아해한 적이 있다. 이후 이 단어가 유래한 성서 본문을 살펴보면서 양 단어의 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변화보다 변모가 더 철저하고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글로 변모는 “모양이나 모습이 바뀌거나 달라지다”를 의미한다. 그런데 성서적인 의미에서 변모는 외모의 변화뿐 아니라 내적인 변화까지 포함한다. 변모에 해당하는 그리스 원어 ‘메타모르포시스’란 말은 실체적 변화, 총체적 변화를 가리킨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묘사하면서 외부적인 놀라운 상태를 기술하면서도 내적인 변화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메타모르포시스’란 단어를 사용했다. 구약시대 사람들인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고 하늘로부터 빛이 나는 구름이 내려오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 부르며 확증하는 장면은 예수님께 일어난 변모가 단순히 외적인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산상변모 주일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대표적인 본문 마태복음 17:1-13을 보면 예수님께서 수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 위에 올라가셨다. 이 산이 어떤 산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 갑자기 산에 올라가셨는지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나와 있다. 산에 오르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다. 마가복음서 저자는 그 희기가 세상의 어떤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막9:2)로 표현했다. 제자들이 체험한 황홀경을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무엇보다도 산 위에서 예수님 일행에게 나타난 태양과 빛의 찬란한 광채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후에 그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기사(출 34 : 29-35)가 연상된다. 물론 예수님은 그보다 더 영광스럽고 강력한 하나님의 광채가 빛났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제자들은 이런 광경이 너무 놀랍고 신비로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냥 그 신비의 자리에, 황홀경 속에 계속 머물러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께 말했다. “주님, 저희들은 주님과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부탁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이때 신비현상은 계속된다. 하늘로부터 빛이 나는 구름이 내려오면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들어라.”제자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러자 예수님은“두려워하지 말라. 일어나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예수님은 신비한 산 위에 계속 머물러 살자는 제자들의 요청을 거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다시 병자를 고치면서 자신의 사역을 더 힘차게 행해 나가셨다.

언뜻 보면 단순한 얘기 같지만, 산상변모의 이야기는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빛과 광채로 변화되셨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거쳐야 될 총체적인 변화,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신비체험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변화의 종교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나 나의 삶이 새롭게 변하고, 나로 인해 내가 속해 있는 가족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와 세계가 변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를 믿고서도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신앙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또 그 변화가 한순간에 지나지 않거나 그 속에 머물고 만다면 신앙은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계속 하락하고 있는 이 시점에 철저한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산 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강력한 현존이 한국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임해야 한다. 그래서 새 힘을 얻어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때이다. 먼저 나만의 변화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진정한 신비체험이 필요한 때이다. 하지만 그 체험에 머물지 않고 세상 한복판에 나와 그 체험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힘차게 실현해 나가야 할 때이다.

도깨비불로 휘황한
그곳만을 꿈꾸는
바보들은 모릅니다

어둑하여 반딧빛도 귀하고
애처로운 이곳을 이곳답게
돌보며 사랑해야 한다는 걸요

분노하는 라디오를 꺼놓고
우리는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이곳이 아쉬운 사람들이니

(출처 :장정일의 시 읽기, 돼쥐보스의 서재)

변화산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 타볼산 위에 설립된 프란시스회 변모교회 / 출처: 위키미디어코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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