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1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1
  • 안양준
  • 승인 2023.02.15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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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한 에세

아주 어릴 적의 기억으로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많은 책을 읽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간이라도 철이 들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죽음은 죽은 후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시는 이 세상에 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는 어떤 연관도 맺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기억에 너무 무서웠던 것은 확실하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흐르고 어쩌다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때, 그래서 수시로 죽음을 직면하게 될 때 그 사람 역시 이젠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갔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바라보게 된다.

전도서 9장은 그런 의미에서 ‘죽음’과 관련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라 생각한다. 1절에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이라는 단서를 붙이는데 개역한글 성경에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이라고 되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개역한글의 번역이 훨씬 더 와닿는 것 같다.

인류 역사에 가장 뛰어난 지혜자라고 여겨지는 솔로몬이 마음을 다하여 궁구하며 살펴보았으니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솔로몬이 바라보는 죽음과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죽음에 별다른 차이는 없다. 좀더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겠지만….

솔로몬의 시각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점을 개와 사자라는 대상을 비교하며 절묘한 예시를 들고 있다. 개와 사자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물론 요즘 시대는 “개 팔자가 상 팔자라”는 옛 말이 어쩜 그리도 정확한 표현이었을까 할 정도로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존재로 극부상하였지만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만 해도 개가 어딜 감히 방 안에 들어올 생각을 하겠는가?

쓰레기통이나 뒤져대던 개들, 그래서 어릴 적에 개들은 하나같이 똥개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개들은 똥을 먹고 사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개들의 음식이 똥이라 생각했다는 말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개는 그런 개를 말하는 것이다. 이세벨이 죽었을 때 개들이 그 살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 날은 개들에게는 억수로 재수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 개와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는 비교 불가의 존재겠지만 생(生)과 사(死)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즉 살은 개와 죽은 사자일 경우에는 사자가 아무리 위엄있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사랑도 미움도 시기도 없어진지 오래라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는 표현보다 죽음을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제 죽은 자는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존재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아무 것도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춤을 출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고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것은 단 하나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변화의 가능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하지만 삶에는 단 하나 책임이 따른다. 살아있기 때문에 뭣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뭣이나 다 하는 것이 지혜는 아니라는 말이다.

솔로몬은 살아있음에 겪어야 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지혜자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고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라는 것….

당연히 남들보다 뛰어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실제 살아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힘있는 자가 반드시 승리한다면 항우가 유방을 이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솔로몬은 살아있는 사람의 비극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 9:12)

그물과 올무는 물고기와 새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를 다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물과 올무에 잡히는 물고기와 새가 있을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물과 올무로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재앙의 날에 걸릴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는 인생이 분명히 죽은 자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있다고 해도 언제나 기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불행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 힘으로 미연에 방지할 수도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결국 전도자는 인생에 대하여 “헛되고 헛되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즉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유추하면 ‘해 위에’ 역사하는 신적 존재에 대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도자가 전도자가 되었던 이유, 바로 해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해 아래서 활동하는 모든 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물론 전도자에게 있어 대상은 ‘해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국한된다. 이미 죽은 자들은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물론 살아있어도 전도자의 말에 관심도 갖지 않고 살아가지만….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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