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0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30
  • 안양준
  • 승인 2023.02.0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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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의 종국

나는 기독교 장례를 주관하며 입관 예식을 거행할 때마다 전도서 7장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을 그 자리에 모인 분들과 함께 낭송하는 시간을 갖는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1)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6-18)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금 사랑하는 ○○○ ○○님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외형상으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이미 영혼이 떠났기에 살아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처럼 장례식장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죽음을 직면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이와 같이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장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죽은 자들에 대해 자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즉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들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고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이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직면하며 그럼에도 다시 부활할 것에 대해 영원히 주와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장례 예식의 의미입니다.

성찬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이것이 나를 위해 주신 주님의 몸이요, 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즉 주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기 위해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장례예식을 하는 이유도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 두라는 것이 장례예식에 참예하는 이유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분을 보내드리는 의미도 있지만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는 약속이 있기에 오히려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시편 49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례식 때 주로 암송하는 말씀이라고 한다. 시편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1,2절)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부한 자든, 가난한 자든 막론하고 모두 들으라고 한다. 이 시편의 중심이 되는 구절은 제일 끝에 나오는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절)는 말씀이다.

간단하게 내용을 간추려 말하면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5절에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개인의 종말, 즉 죽음이라 고쳐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날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죽음은 모든 이를 대상으로 다가온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10절)이란 말씀이 죽음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다. 

죽음의 때에 부유한 자들도 자신의 재물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을 본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가?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11절)

자신의 부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지하에 방을 만들어 금은보화를 감추고 가끔 내려와 “사랑스런 나의 금은 보화여, 너희들 외에 무엇이 내게 기쁨을 주겠느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방에 들어갔는데 문이 닫혀버렸다. 그 문은 닫히면 자동적으로 잠기는 문으로 안에서는 열 수가 없는 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 장소가 발견되었을 때 금은 보화와 함께 있는 해골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경우야 거의 없겠지만 재물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편 49편의 부제에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했는데 개역성경에는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다. ‘영장’이란 지휘자가 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연주되는 제의 음악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제의는 장례식일 거라고 한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도 죽으면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예전에는 한 평 남짓한 땅 속에 묻혔지만 요즘은 가로, 세로 50cm 밖에 않되는 봉안당이나 자연장이 자신의 몫으로 주어질 뿐 대부분 화장을 통해 한 줌의 가루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짐승의 죽음만도 못하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부유한 자들의 장례식은 대단히 거창하게 치러진다. 많은 이들이 그가 이룬 치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다른 여느 시대보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이 땅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일 뿐이다. 하나님이 주신 금을 더 많이 소유했다고, 하나님이 주신 석유를 더 많이 소유했다고…. 대체적으로 이 땅에서의 부자라는 개념이 그런 것 아닌가?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것들이 완전히 내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17-19) 

여기서 말하는 역대 조상이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열조’와 같이 좋은 의미에서 씌여진 것이 아니라 본 시편에 등장하는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와 같이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물질에 의존한 삶을 살다가 파멸에 이른 모든 자들을 지칭하는 것 뿐이다.

이런 자들을 성경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이들의 결국을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가르치고 있다.

구약성경도 구원의 개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15절)

물론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후 이 땅에 오셨을 때 말씀하셨던 말씀의 핵심이었던 천국의 개념이 확실하게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구약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 자신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렇기에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16절)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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