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는 아르미니안인가? 웨슬리는 웨슬리이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인가? 웨슬리는 웨슬리이다!
  • 송양현
  • 승인 2023.01.2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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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음주의영성협회(이규학 이사장) 신년 정기 포럼
이규학 이사장

한국복음주의 영성협회(이규학 이사장)는 지난 19일 목요일 인천제일교회(김규열 담임목사)에서 정기 포럼 및 신년 하례회를 가졌다.

이날 포럼은 감리교신학대학교 전 총장 김진두 목사를 초청해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인가?’라는 주제로 감리교회가 왜 아르미니안적 신학 때문에 이단이라는 오명을 받고 어려움을 겪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김 목사는 강연 앞서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인가? 개신교에서는 아르미니우스가 전통이 아니라고 인식되어 있다. 감리교회가 아르미니안주의 신학을 포함하고 있어서 인본주의라고 공격을 받는 것이다. 감리교회가 신학적 대응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전통의 계보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바울, 어거스틴, 루터, 웨슬리로 가는 신학적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연에서는 아르미니우스를 목회자로 소개하면서 그가 목회를 하다가 반 칼빈주의를 선언하고 목회 현장에서 생긴 신학이 아르미니안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예정론 논쟁의 발달은 칼빈주의와 반칼빈주의학파가 생기면서 시작된 것으로, 네덜란드에서 반칼빈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연구자로 선임됐다가 정작 본인이 반칼빈주의가 된 이력을 간략히 소개했다. 특히 아르미니우스는 반칼빈주의자로써 칼빈주의에 대한 3가지 요점정리를 아래와 같이 했다고 정리했다.
첫째 아무도 죄를 짓지 않고는 저주받지 않는다.
둘째 선행은 공로화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교회가 선행을 권장할 수 없게 된다.
셋째 최후까지 구원은 칭의부터 자동적으로 보장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신자는 거룩한 생활을 멀리하고 교만하게 되어 있다.

독특하게도 반칼빈주의 5대 교리가 칼빈주의의 교리보다 먼저 나왔으며, 후에 도르트종교회의에서 예지 예정에 대한 부분이 정리된 역사적 연대기를 덧붙였다. 김진두 목사에 따르면 아르미니우스도 선택이라는 것을 믿었으며,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이뤄지고, 칼빈주의자들은 무조건적인 선택이었지만 아르미니우스는 조건적 선택을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아르미니우스가 성서적이다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로 튤립교리가 발표(전적인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르미니안주의가 유럽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은 당시 유럽에 개혁주의 신학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며, 경험을 중시한 영국으로 건너가서 그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웨슬리의 부모 역시 아르미니안이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웨슬 리가 칼빈주의에 관심을 갖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자 어머니가 극단적 예정론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더니 웨슬리도 그렇습니다라고 답한 편지로 영국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웨슬리가 창세전 예정론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됐고, 아버지의 창세적 이중 예정론이 운명론적이라는 설명에 감화를 받음으로써 부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예정보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라고 생각을 정리하게 됐음을 확인했다.

김 목사는 존 웨슬리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다름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력으로도 구원이 가능하지만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 자체는 인간 스스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제로다’라고 웨슬리는 주장했으며, 원죄와 전적타락에 대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원죄를 부인하면 믿음도 구원도 예수도 필요없는 자들 즉 이단이라고 정의 내렸다. 또한 선행적은혜로 자유의지가 회복이 된다 할지라도 선행적 은혜는 미약하기에 하나님을 믿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순간 사라지고 원상태로 돌아가기에 존 웨슬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선택으로 충분히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다름을 보여준다고 정리했다. 여기에 김진두 목사는 정말 선행은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어도 되는 것 아니냐며 아르미니우스는 선행은총으로 자유의지를 너무 강조해서 길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웨슬리는 원죄의 의미는 복음 전도에 근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 십자가 은혜에 모든 것이 맞춰져있고 그가 표준설교 곳곳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내용은 회개하는 것 믿는다는 것 인간의 힘으로 힘들기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김 목사는 존 웨슬리에게 복음주의 신학의 중심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며, 그런데 값 없이라는 것은 화폐의 값이 아닌 살 수 없는 선물로써의 의미가 있기에 이것을 깨달은 존 웨슬리는 칭의를 받고 그 때부터 성화가 시작되는 것이지 성화가 먼저가 아니라고 신학노선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예정론 교리는 신앙고백적 교리라며 누구든지 믿음이 좋아지면 회심하면 다 예정론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한 것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이냐? 인간의 노력이냐?의 부분은 해석이 불가능한 신비의 영역이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정리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전 총장 김진두 목사

아래는 이날 발제한 원고 중 마지막 결론 전문이다.

결 론: 웨슬리는 웨슬리이다

성서에 나타난 예정론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모든 주권과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양하는 신앙고백적인 교리이며, 동시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영광의 교리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Christian Institute)에서 예정론을 신론에 두지 않고 제3부의 성령론과 연결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교리로 다루었다. 칼빈은 결코 예정론이 신의 본성을 설명하는 교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예정론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바로 이점에서 자기들의 신앙의 아버지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실수를 하였다고 여기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영국교회사에서 복음적 회심을 체험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주 특이하게도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웨슬리 형제였다.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면 복음주의자가 되고 하나님의 특별히 자신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믿음을 갖고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본래 칼빈의 예정론은 목회의 경험에서 나온 목양적 교리(pastoral doctrine)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생애 최후까지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고 영원한 천국에 이르도록 믿음을 확고하게 도와주는 목양적 경험과 관심사에서 나온 교리이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는 처음부터 구원의 확신에 관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순례의 길을 걸으며 달려갈 길을 다 달리는 중에라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여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누구나 믿음이 약해져서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내세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영혼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어 위로와 평안과 천국의 소망을 주려는 것이 예정론 교리의 본래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도 몇몇 서신에서 극심한 박해와 세상의 환란을 당하여 영적 전투를 싸우며 때로는 신앙이 약해져서 흔들리고 있는 신자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과 천국의 소망을 주려는 간절한 목양적 심정을 가지고 창세전 예지예정의 신앙을 가르쳤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을 포함하여 터툴리안과 오리겐 같은 많은 초대교부들도 예정론을 가르쳤고 마틴 루터도 예정론을 가르쳤다.

예정론은 신앙의 순례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경험적인 교리이며, 순례의 경험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적 교리이다. 예정과 선택의 교리는 경험 전의 교리가 아니라 경험 후의 교리(doctrine posteriori)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삶의 여정을 다 마치는 순간까지는 누구도 선택에서 제외되었고 영원한 저주에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말하는 것은 신의 주권을 침해하는 오만이다. 시간 속에서 지나는 인간 존재는 창조주의 주권과 영원의 비밀을 모두 다 세심히 알 수도 없고 더욱이 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요 불손이라고 여겨진다. 영원의 세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신비이다.

진실한 신자들은 하나님이 죄 많은 자신을 불러주시고 선택하시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은혜(saving grace))를 믿음으로 사탄도 죽음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 세상에서 승리에 찬 삶(triumphant life)을 살 수 있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참된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감사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경건하고 아름다은 교리로 손꼽히는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은 제3부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교리의 주제를 ‘감사’(gratefulness)라고 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자의 일생의 삶은 부름 받고 선택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복음주의와 경건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디까지나 예정론은 신앙고백적 교리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순례를 지나면서 뒤를 돌아볼 때에, 그리고 인생의 순례를 다 마치고 걸어온 발자취를 바라볼 때에 연약한 죄인이 구원받고 살아온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은혜를 생각하여 감사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고백적 교리이다. 그것은 사탄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에 영원토록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찬양하는 신앙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진실하고 경건한 성도의 감사와 찬송과 송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창세전’이라고 하는 말을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최후까지의 구원이라는 교리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는 강조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우리의 구원과 이 세상 나라와 달리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천국의 소망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용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한 속성을 가리키는 확신의 고백적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아르미니안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진정 그들은 칼빈의 예정론에 담긴 신앙고백적 의미를 진지하고 섬세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만 판단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에만 몰두한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임스 파커가 지적한 대로 아르미니안들은 어디를 가나 미끄러운 비탈길을 걸을 수 있고 위험한 길에서 기우뚱거리고 헛발을 딛고 미끄러지기 쉬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로 이점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약점을 드러내고 정통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웨슬리는 옛날 정통에서 벗어나서 이단의 경계선을 드나들었던 펠라지우스의 계승자가 절대 아니다. 아르미니우스가 이단의 마당을 밟았던 펠라지우스의 계승자라고 인정된다면 웨슬리는 결코 아르미니안이 아니다. 일부 장로교에서는 웨슬리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을 계승하며, 옛날 펠라지우스의 이단의 경계선에 걸려있다는 의심을 한다면 웨슬리안들이 나서서 속히 그들을 가르치고 수정하여야 한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분명히 다르다. 인간이 구원 받는 것은 인간 편에서 이성적으로 볼 때에는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국 구원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이나 의지나 능력이나 지혜나 그 무엇으로도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천국을 얻을 수 없다는 성서적 진리를 웨슬리는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체험하였으며, 믿음, 회개, 칭의, 신생, 성화, 그리고 영화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고 언제나 확실하게 가르치고 전했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예정의 교리가 신의 창세전 무조건적 선택과 유기를 주장하여 인간의 운명론으로 인식되어 온갖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를 믿을 때에는 아무리 경건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잘못된 선민의식과 오만한 생각을 갖고 어떤 특정한 사람을 선택받지 못했고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임의로 판단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전도와 선행과 성화에 게으를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한 것이다. 칼빈주의자이든지 아르미니안이든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선택이든 예정이든, 그리고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의 신비를 다 알 수도 없으며,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불손한 태도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비밀스런 영역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 한다.

예정론 교리는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성서적 교리이며, 아주 신앙생활에 유익한 교리이다. 그러나 예정론은 고백적인 교리이지 공적으로 자랑하거나 설교의 중심이나 전도의 중심 메시지로 삼아서는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칼빈도 예정론을 설교에서 거의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 웨슬리는 일평생 한 영혼이라도 구하려는 열정적인 전도자로서 살았기에 예정론이 미칠 위험성에 예민했을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정적주의자(quietist)가 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아르미니안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행동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공정하게 관찰을 해보면 성경은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다 지지한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시고 계시하시고 십자가에서 고귀한 희생을 통하여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구원의 은혜를 인간의 영혼과 마음과 사람에 적용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근본 진리이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억지로 자신의 뜻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이다. 성경에서나 어느 시대에서나 인간들이 종종 하나님을 믿고 순종도 하지만 반대로 거역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본다. 우리는 성경에서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여러 세대에 전도자들이 죄인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고 호소하는 간절한 소리를 듣는다. 죄에 타락하여 길 잃은 양같은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못하고 선을 행할 힘도 없어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천국은커녕 멸망의 낭떠러지에도 질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끈임 없이 죄인들을 구원의 자리로 초대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고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회개하고 생명을 선택하고 천국을 취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인간을 격려하시고 기다리신다. 이렇게 보면 복음전도와 구원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있고 인간이 하는 요소도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구원 얻는 데에 있어서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님의 은혜냐 인간의 자유의지이냐 라는 질문에는 인간 편에서 한 가지 단순한 대답만 있을 수 없다. 즉 성경을 살펴보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인간의 책임성이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의 이성적 이해와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 100% 인간 100%, 또는 각각 50% 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신학이라도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 만족할만한 설명은 없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신의 신비의 영역이요,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사실상 ‘은혜로’ 또는 ‘믿음으로’라는 말 자체가 신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칼빈주의자도 아르미니안도 웨슬리도 완전하지 못했고 부족했고 오류와 실수도 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하여 항상 무지와 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야 한다.

모든 경건한 신자는 자신의 죄와 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진실하게 응답하지 못하고 의와 선을 행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동시에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불러주시고 선택하시고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의 신비를 생각하고 찬송한다. 그리고 진실한 신자는 이와 같은 신의 부르심과 선택이 의지가 약한 나의 인간적인 응답보다 더 앞서고 귀중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신의 부르심과 선택은 결국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로 결단하는 응답을 가능하게 한 근거가 되는 것이며, 신자의 궁극적 확신과 평안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하여 이 두 가지 요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신비로운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선택이냐? 자유의지냐?”라는 신학적 문제를 시원하게 푼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시간과 영원에서 우리가 맛보는 하늘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신학자 찰스 시므온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과 경험을 통하여 묵상하다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는 진리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 있지 않고 양쪽의 극단을 모두 다 수용하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묵상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묵상은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한 최선의 답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기도에서는 칼빈주의자가 되고 설교에서는 아르미니안이 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 말은 실제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설교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실제로 무릎을 꿇을 때에는 칼빈주의자가 되고 강단에서는 아르미니안이 되고자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웨슬리안들은 예정론을 믿고 있으며,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웨슬리 방식으로 신앙생할하고 있다. 대부분의 칼빈주의 목사들은 웨슬리의 복음주의 방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고 있다. 이것은 신학자 찰스 시므온의 견해가 성서적이고 경험적으로 맞다는 증거가 된다.

신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라는 성경의 두 가지 주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싫어하여 버리고 어느 하나를 좋아하여 수용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확신을 못주고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두 가지 교리는 모두 다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진리이며, 두 가지 모두 다 중요하다. 칼빈도 아르미니우스도, 그리고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안들 모두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는다는 생각이 든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인가?” 웨슬리를 아르미니안이라고 칭하는 데에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서려 있다. 첫째는 교회사에 유산으로 흘러온 신학사상사에서 신학적 성격과 전통을 분류하는 습관이며, 둘째는 18세기 메토디스트 부흥운동에서 일어난 웨슬리와 칼빈주의자들과의 교리 논쟁이다. 웨슬리 당시에 칼빈주의자들과의 신학 논쟁이 없었다면 웨슬리에게 아르미니안이라는 호칭이 붙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웨슬리는 반세기 이상 칼빈주의와 싸웠고 동시에 아르미니안 신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아르미니안이라고 한 마디로 단순하게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더군다나 웨슬리가 부분적으로 아르미니우스와 신학적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를 단순히 아르미니안이라고 칭하면서 마치 실제로 그가 이단적 교리를 전파했다고 인정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무지하고 악의적이다. 웨슬리는 성서적 복음주의자요 열성적인 복음전도자이다. 이것은 웨슬리의 가르침과 설교와 삶과 실천이 확실하게 증명한다. 웨슬리는 평생토록 회개와 믿음, 구원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 그리고 마음의 성결과 삶의 성화를 전파하는데 헌신하였으며, 특별히 개인의 구원만 아니라 사회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복음의 사도였다.

앞에서 밝힌 대로 부득불 신학적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 웨슬리는 복음적 아르미니안 또는 실천적 아르미니안 또는 웨슬리안 아르미니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르미니안이라는 칭호가 이단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던 펠라지우스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웨슬리를 결코 아르미니안이라고 호칭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절대로 아르미나안이 아니다. 만약에 그 누구라도 웨슬리를 이단이라고 말한다면 그가 곧 이단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웨슬리는 복음주의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체험하고 실천하고 전파한 복음주의자이다. 그는 성서적 복음주의자요 경건한 복음주의자요 실천적 복음주의자였다. 웨슬리는 웨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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