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22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22
  • 안양준
  • 승인 2022.12.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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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죽음

왕상 21:은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절에 있었던 한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아합의 별궁이 있던 이스르엘 근처에 있는 포도원을 갖고 싶어 소유주에게 매입 의사를 비춘 것이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자신의 별궁 근처의 땅을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왕상 21:2)

아합이 자신이 지닌 물리적 힘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하려 한 것도 아니고 쌍방의 동의하에 그에 상응하는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취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상대방의 반응은 어떠한가?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
간단히 표현하면 ‘No’이다. 분명한 거절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에도 전혀 손해가 되지 않을 아니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한 것이다. 결국 사건은 확대되어 포도원 주인이었던 나봇 뿐 아니라 그의 가족이 몰살 당하고 만 것이다.

사건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좀더 가까이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포악한 왕이었던 아합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나봇으로부터 거절 당한 후 아합이 취한 행동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왕상 21:4)라는 것이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당시 이스르엘에 있던 아합의 궁은 여름을 나기 위한 별궁으로 상아로 지은 화려한 궁전이었다고 한다. 왕상 22:39에 등장하는 상아궁이 이스르엘에 위치한 것으로 근처에 있는 포도원을 탐낸 것은 단순히 채소 밭을 삼으려는 목적보다는 상아궁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했다고 취하는 그의 행동은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하는 수준이 아닌가? 왕비 이세벨이 이유를 물었을 때 자초지종을 설명하지만 거절하는 핵심 사유에 대해서는 숨기는 아합의 이중성을 볼 수 있다. 즉 나봇이 거절한 것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기업을 팔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율법 때문이었다. 왕권으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이방 출신인 이세벨에게 떠넘기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세벨은 아합보다 더 악한 인물로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취한 행동은 이스르엘에 거주하는 장로와 귀족에게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어인을 찍어 보낸 것이다. 내용은 거짓 증인 두 사람을 법정에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하여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다. 결국 절대권력 앞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 했던 나봇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상속자인 나봇의 아들들도 모두 죽여 버렸다.(왕하 9:26) 한 마디로 ‘아합의 나봇의 포도원 탈취 사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대 권력, 그에 충성하는 관리들, 불의에 침묵하는 사회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나봇을 제거할 때 금식을 선포하고 율법에 의지하여 두 사람의 증인을 세우고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를 과연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스르엘의 장로들은 나봇을 죽이려는 이세벨의 간계에 반발하기는커녕 적극 동참하였다. 거짓 증인을 세우는 것에 대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70인역 성경에는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아합이 옷을 찢고 베옷을 입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과연 그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구색을 맞추기 위해 율법이 필요할 뿐이다.

이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의인이 무고히 죽임을 당하고 악한 왕이 폭력으로 남의 기업을 차지함에도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항변하거나 바로 잡을 인물이 등장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한 마디로 비정한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이스르엘로 내려간 아합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왕상 21:19, 23-24)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재앙을 내려 쓸어 버리겠다는 표현을 하신다.(왕상 21:21) 어쩌면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아합은 인간 쓰레기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쓰레기는 빨리 정리해야만 다시금 청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없는 상황은 한 마디로 암흑 그 자체이다. 권력자가 힘없는 백성의 재산을 탐낸다든가, 힘있는 자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고 빼앗고 죽이되 아무도 비판하는 자가 없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은 공포스러울 따름이다.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무소불위의 권력도 무너뜨리는, 온갖 음모와 비리가 결국 드러나고 마는 세상의 권력자보다 더 큰 권세를 지닌 분이 불꽃 같은 눈으로 이 땅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처럼 그렇게 되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에도 현실은 답답하고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없는 민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복음은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전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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