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이 함께 경험하는 일이라 여겨지는 상황이 최근에 필자에게도 일어났다. 이른 새벽시간에 교우 핸드폰 번호의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이런 경우 많은 목회자들이 긴장하게 되는데 좋은 일 보다는 어려운 일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촌교회를 섬기는 필자로서는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전화벨이 울리면 습관적으로 바다 조업을 하는 누군가를 떠 올리며 쉽게 받지 못하는 마음 조아림이 트라우마처럼 존재한다. 어촌의 경우 물때를 따라 조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도시의 출퇴근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늘 존재한다. 이런 가운데 교회 최고 연장자 권사님의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순간 권사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닌가 생각되었다. 전화를 받으니 아니나 다를까 울부짖으며 말을 건네 왔다.
“목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권사님에게 무슨 일 있어요?”
“목사님, 우리 00이가 죽었어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 새벽에 배 나갔다가 그만 사고가 나서 그랬데유, 목사님 어떻게 해유”
“지금 어디에 있나요?”
“지금은 00병원인데요, 00장례식장으로 옮겨유”
“저희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이 가정은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집안이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지를 옮기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을 때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했던 가정이기 때문이다. 내색 없이 금식하며 기도를 시작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남편 권사님께서 사택 문을 두드리고 필자 내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도사님 다른 교회로 가시려구유?”
“아니요, 누가 그래요?”
“아니유, 꿈에 전도사님이 가시는 거 봐서 그래유, 힘들어도 가시면 않되유, 정 가시려면 저 천국 보내주고 가세유”
“제가 어디로 가요, 권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안가요”
그날로 금식을 멈추고 못가겠다고 연락을 취하게 만들었던 가정이다. 안타깝게도 권사님의 외아들이 놀음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하고 설상가상 배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다시피 하는 대형사고로 가정을 건사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그의 아들 셋이 일찍부터 가정을 지켜야만 했다. 사고 난 아들은 권사님의 친손자 3명 가운데 둘째이다. 삼형제중에서 제일 왜소한 둘째가 뱃일만큼은 동네에서 어린나이부터 인정을 받았고 아빠와 다르게 어민 후계자의 꿈을 가지고 그리 힘들다는 어선을 타는 선택을 한지 1년 남짓 된 것이다.
그날도 물때를 따라 새벽 2시에 조업을 나갔고 출항한지 3시간도 안되어 사고가 난 것이다. 필자 내외에게 삼형제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셋째가 5살 코 흘리게일 때부터 밥상을 같이 하며 함께 지냈던 아들처럼 여기는 아이들인데 놀림당하고 왕따당하고 이용당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이다. 이 형제들의 어린 시절이 교회학교 역사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교회 먼저인 아이들이었다. 교회로 올라오려면 반드시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가 계시는 집 대문 앞을 지나쳐야만 하는데 둘러멘 가방 그대로 교회로 올라오던 아이들이었고 저녁을 먹여야만 내려가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가 동네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으로 인정을 받고 만날 때마다 필자 내외에게 함박웃음을 쏟아 주는 참 좋은 아이었다. 그러나 장례 중에 둘째의 가까운 선후배들을 통해 들었던 28년 삶이 얼마나 무겁고 힘이 들었었는지 알 수 있었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모는 장례 기간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필자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참아야만 했었다. 발인 예식에서 필자가 남길 수밖에 없었던 말이다.
“오늘 우리 모두는 고인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믿습니다. 비록 28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70년을 살아냈던 사람들과 같이 갑절의 삶을 경험하게 하셨고 많이 사랑하셔서 그 짐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영적 아들 하나를 가슴에 묻습니다. 28년의 무겁고 긴 삶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수고와 슬픔, 고통이 없는 그의 나라로 고인을 인도하셨음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며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