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18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18
  • 안양준
  • 승인 2022.11.16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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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죽음

나의 범죄로 인해 누군가가 희생된다면? 그리고 그 희생 대상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대상이 있는가? 이 글은 다윗에 관한 이야기로 다윗의 범죄 결과 그 아들이 희생을 당하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례가 다윗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되기에 그리 낯선 내용이 아닐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전제는 인류 전체의 범죄라는 공동의 테마(Thema)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강단은 사랑으로 채색되고 그 결과물로 주어지는 축복을 강조하다보니, 전제로서의 범죄는 까마득하게 지워져버린 어슴푸레한 과거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늘 “사랑하기에 너희 죄를 모두 용서해주마.”라고 외치는 분으로 알려져 ‘값싼 복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너무 간단한 등록 절차 때문에 ‘회개’의 과정이 생략된 것 같이 느껴지기에 싸구려처럼 전락하고 만 것이다.

물론 다윗이 저지른 범죄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심각한 죄였다. 가정이 있는 여인을 겁탈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남편에 대해 살인 교사를 한 것이다. 당연히 죽어 마땅한 죄라 할 수 있다. 이는 다윗이 왕이라 할지라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 책망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에 대해 내리신 징계는 “첫째,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둘째,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백주에 동침하리라.”는 것이다.

그때 다윗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순순히 고백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주는 대신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대두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신 24:16에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취지는 개개인은 누구나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죄로 인해 죽게 될 이 아이는 위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성경은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삼하 12:14)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평가의 기준이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가 어떠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자신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고, 신정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의 범죄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충분히 비방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삼하 12:15)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징계 방식이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에 대해 우리가 뭐라 말할 수 있는가? 그로 인해 생명을 구했으니 단지 감사할 따름이다.

그때 다윗이 한 행동이 무엇인가?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삼하 12:16-17)

다윗은 그 아이의 병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을 알기에, 자신에 대한 징계로 받아들이기에 금식하며 밤새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다윗이 쓴 참회시 가운데 시편 6편이 아마 이때의 상황을 적은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6:2-3)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겨 생명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다윗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럼에도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대로 이레 만에 아이가 죽고 말았을 때 이후 순간의 유혹으로 죄악을 범하는 일을 가벼이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가 죽은 후 다윗의 행동은 이상하다.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삼하 12:20)

돌변한 다윗의 행동에 “어찌 됨이니이까?”라고 묻자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2-23)고 하였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기에 먼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이후에 먹는 것이다. 다윗이 말한 대로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에 대한 부분이 인간에게 속한 영역이라면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사람이 죽으면 혼이 위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은 갈 수 있지만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칼이 영원히 떠나지 않고, 백주에 동침하는 사건이 삶 가운데서 그대로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죄는 수행이나 덕을 쌓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따르는 징계는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이 이 땅에서 평안한 삶으로 마감하는 자가 있다면 일생 동안 죄를 짓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말하는 사생아에 불과한 그래서 천국 대신 영벌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다윗의 죄를 대신하여 그 아들이 죽은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것은 그로 인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특혜를 받았기에 구약과 같이 엄청난 징계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회개와 징계를 통한 연단과 훈련의 과정은 필수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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