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우리는 가족이야
목사님, 우리는 가족이야
  • 남광현
  • 승인 2022.11.12 0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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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거주하는 사택은 교회 구조상 지하 1층에 위치한다. 교회를 건축할 때 언덕 일부를 절개하여 건축했기 때문이다. 전면에서 보면 2층 건물이지만 교회 마당에서는 주택이 보이지 않는다. 주택의 위치가 이러하다 보니 교우들이 아니고서는 목사의 거주지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주택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요란스럽게 짓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대부분은 낫선 이들이 주택으로 내려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유독 교우 한 분만큼은 7년 가까이 함께 지내고 있음에도 만나기만 하면 짖는 바람에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윤동아 나야, 그만 짖어”

“야, 이놈아 맨날 봐도 그렇게 짖냐”

“이리 와, 이것 먹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볼 때마다 그렇게 짖어대니 참 난감하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성도는 교회와 특이한 관계로 발걸음을 하게 된 분이다. 타지에서 뱃일을 하려고 마을로 들어와 봄에는 광어 배를 타고 가을에는 전어 배를 타며 뱃일을 해 왔고 가끔, 겨울에는 김살배(필자주: 지주식 김 양식장에서 사용하는 소형 선박을 이르는 명칭)를 타기도 하며 이 마을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분이다.

약 10년 전쯤 12월 한파가 매서울 때 외부 행사를 마치고 늦게 교회로 돌아왔는데 교회 한쪽에 창고처럼 사용하는 컨테이너 안에서 불빛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누전으로 불이 난 줄 알고 놀라서 가 보았더니 사람이 자고 있었다. 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이불을 덮고 휴대용 부탄 버너를 켜 놓고 잠을 자고 있었고 그 버너 불빛이 컨테이너 밖에서는 불길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늦은 밤에 언뜻 보아도 행색이 노숙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고 소통이 어려울 만큼 말도 어눌해서 난감했었다. 일단 난방을 해서 잠을 재우고 다음날 아침에 만나보니, 전날 밤에는 경황이 없는 느끼지 못했던 모습과 냄새가 옆에 다가가 이야기 나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배를 타고 교우 중 누구누구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을 어렵게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중에 같은 성씨인 관리부장 권사님께 연락을 취하고 함께 만났다. 남자권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기에 필자와 달리 그분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고 더해 현 상황에 대해 필자의 이해를 도와주었다. 결론은 이 성도가 돈의 가치를 몰라 긴 세월동안 뱃일을 하고 있음에도 겨울에는 돈이 떨어져 여기 저기 기숙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중반에 마을에 들어와 근 30년 동안 배를 타며 적지 않은 돈을 벌어 왔는데 매년 겨울만 되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도움을 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당사자는 자기 돈을 빼 가려는 사람으로 오해하기 일쑤였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오해받는 일까지 생겨 결국 최근에는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로 얼마 전까지 도움을 주려 했던 분이 권사님 가정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권사의 말에 의하면 이 성도가 천원 권과 만원 권 그리고 오만원 권 구분을 못하고 사용하니 이 사실을 아는 일부 식당과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해 왔다는 것이다.

교회 회의를 통해 그 해 겨울은 교회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난방시설을 관리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 성도와 소통하기 위해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고향이 부산이고 아버지 등에 업혀 교회를 가기도 했었다는 말과 부산에 동기간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연락처를 알아볼까 싶어 핸드폰을 확인 해 봐도 저장이 되어 있지 않았고 글과 숫자를 모르기에 핸드폰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설 명절을 앞두고 동생에게 다녀오고 싶은데 차비가 없다고 해서 여비를 마련해 주고 매일 여러 차례 일부러 전화를 걸었다. 정말 동생들을 만나러 갔는지 아니면 술값이 필요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돈의 가치는 몰라도 서천에서 부산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이용할 줄 알고 있었다. 부산의 여동생 집에 도착했을 때 통화가 되어 60이 다된 여동생과 통화를 할 수 있었고 오빠가 긴 세월동안 어찌 살아 왔는지를 전하고 여동생 2명이 있다는 말과 오빠와 함께 교회로 찾아오겠다는 인사를 건네받았다.

이후 뱃일을 하고 버는 돈은 통장을 통해 여동생들이 관리를 해주고 사는 집도 마련되어 지내면서 교인이 되었고 3년 전에 허리 수술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기까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여름이면 아이스커피를 함께 마시고 겨울에 눈이 오면 목사보다도 먼저 교회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며 인사를 나누는 성도가 된 것이다. 성도님의 어눌한 말이 들려지기 시작한 시기도 이 때부터였으며 만날 때마다 필자에게 건네준 말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다.

“목사님, 이제 우리는 가족이다. 맞지요”

“목사님, 우리는 가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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