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15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 15
  • 안양준
  • 승인 2022.10.2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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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애가

가끔 가까운 이의 부고 소식을 듣고 조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1969년 공포된 <가정의례준칙>에 ‘조문’에 관하여 “성복이 끝나면 조문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 「사례편람」과 절차가 동일하나 조(弔)라는 용어 대신에 조문(弔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고인에 대한 예를 금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용어의 의미상 성립되지 않는 용어이다. <의례준칙>에서는 이를 조위(弔慰)라는 항목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음식접대, 조화를 금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자(朱子,1130-1200))가 쓴 「가례」(家禮)를 흔히 「주자가례」라고 호칭하나 이재(李宰,1680-1746)가 이를 보완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고 실용적인 가례서로 저술한 것이 「사례편람」(四禮便覽)으로 가장 대표적인 가례서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된 ‘조문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장례지도사 표준교육교재) 

① 조문객이 이미 명함을 냈으면 상가에서는 촛불을 밝히고 자리를 깔고 모두 곡하면서 기다린다.
② 호상이 나아가서 조문객을 맞이한다.
③ 조문객이 들어와 대청에 이르러서 읍하면서 말한다. "듣자옵건대 ○○분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니, 놀라고 슬프기 이를데 없어서, 감히 들어가 뇌(酹)하고 아울러 위로하는 정을 펴고자 합니다."
④ 호상이 조문객을 안내하면 영좌 앞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픔을 다한다.
⑤ 조문객은 두 번 절하고 향을 사르고,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고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호상이 우는 사람을 그치게 한다.
⑥ 축관이 서향해서 무릎을 꿇고 제문과 전장(奠狀), 부장(賻狀)을 조문객의 오른쪽에서 읽는다.
⑦ 축관이 읽기를 마치고 일어나면 조문객과 상주가 모두 곡하며 슬픔을 다한다.
⑧ 조문객이 재배한다.
⑨ 주인이 곡하면서 나와 서향하여 이마를 땅에 대고 두 번 절한다.
⑩ 조문객이 또한 곡하면서 답배하고 나아가 말한다. "뜻밖의 몹쓸 변고로 ○○친속 ○○벼슬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생각건대 슬프고 사모함을 어찌 견디시겠습니까?"
⑪ 상주가 대답한다. "제가 죄가 깊어 화가 ○○친속에게 미쳤음에, 가져다주신 전과 뇌를 엎드려 받자옵고, 도 아울러 오셔서 위로함을 내려주시니 서글픈 느낌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⑫ 상주가 또 두 번 절하면 조문객이 답배한다.
⑬ 또 서로 마주 보고 곡하며 슬픔을 다한다.
⑭ 조문객이 먼저 곡을 그치고 상주에게 달래기를, "명의 길고 짧음은 다 운수가 있으니, 몹시 슬퍼한들 어쩌겠습니까? 부디 상주의 생각을 억누르시고 굽혀 예법을 따르십시오."라고 한다.
⑮ 조문객이 읍하고 나아가면 상주는 곡하면서 돌아가고 호상은 대청까지 전송한다.
⑯ 상주 이하 곡을 그친다.

전통 장례에서 말하는 조문 순서를 통해 ‘유교’에서 말하는 예법의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웠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조문이란 평소 존경하였거나 사랑한 이의 임종을 슬퍼하며 충분한 애도를 표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에 ‘죽음’에 관한 기록은 여러 차례 찾아볼 수 있으나 ‘조문’에 관한 기록은 흔치 않은데 사무엘하 1장에 등장하는 ‘다윗의 애가’ 혹은 ‘활 노래’라 불리는 말씀 속에서 죽은 이에 대한 조문 –정확히 말해 조문은 아니지만- 달리 말하면 애도에 대해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그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한 다윗의 행동은 어떠한가?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하 1:11-12)

옷을 잡아 찢는 것은 극도의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하는 행동으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사울 왕과 가정 절친했던 사이였던 요나단의 전사(戰死) 소식은 자신의 동족들이 블레셋 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육당하였다는 것, 이스라엘의 패배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슬픔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른 애가(哀歌)를 통해 다윗의 신앙 인격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한다.
실제로 사울의 죽음은 다윗 자신에게는 이익이었다. 그 동안 사울을 피해 방랑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불행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사울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기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삼하 1:20)라고 한 것이다.

둘째, 영적 권위를 존중한다.
다윗이 사울을 존중하는 것은 그의 인격이나 위대한 업적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울은 실패한 인생을 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 다윗의 행동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에서 ‘겉옷 자락만 벤 것’(삼상 24:4)과 ‘창과 물병만 갖고 간 것’(삼상 26:11)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자신이 죽였다는 아말렉 소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삼하 1:14)라고 한 것이다.

셋째, 허물을 덮고 칭찬한다.
다윗의 애가를 ‘활 노래’(삼하 1:18)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삼하 1:22)라는 글에서 연유한 것이다. 역대상 8장 40절에 베냐민의 자손들은 활을 잘 쏘는 자라는 글이 있다. 다윗은 짧은 애가 속에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켜 네 번이나 ‘두 용사’라고 표현하며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삼하 1:23)라고 표현한다. 흔히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전의 원인을 물어 비난하기 바쁠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의 허물을 들추지 않고 그들에게서 칭찬할 것만 찾을 뿐 아니라 그것이 다윗의 진심임을 알게 될 때 그의 신앙 인격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요나단과 나눈 아름다운 우정을 노래한다. 여인의 사랑보다 더한 사랑, 요나단이 일방적으로 다윗에게 쏟아부었던 기이하다 표현할 만큼 아름다운 사랑, 그래서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고인 앞에 설 때 우리의 모습은 다윗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죽음이 이미 모든 것을 덮은 까닭이다. 그러기에 고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름다움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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