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의 가능성은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의 가능성은요?
  • KMC뉴스
  • 승인 2022.09.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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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열세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의 가능성은요?

홍보연 목사(맑은샘 교회)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을 위한 전통적인 목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성, 장애인, 노동자, 이주민 등 사회적인 약자를 위한 목회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목회의 가능성은 어떠할까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교회가 건강하게 꾸려지게 하는 가능성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요?

교회와 사회적 약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은 성경이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는 교회의 매우 중요한 사명이며 책임입니다. 성경은 당시 가장 밑바닥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볼 것에 대한 구체적인 권고와 율법의 적극적인 보호(신명기16:11~14, 24:17~22)를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돕고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주시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내셔서 형통하게 하신다.”(시편68:5~6)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말라기 3:5)

또한 희년 정신(레위기 25장), 사도행전에 기록된 공동체의 삶(2:44~45, 4:34~36) 등의 말씀을 통해 얼마나 절절히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31~46장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행하는 일들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일이라고까지 말씀하시며 사회적 약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가 아닌가는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25:41~46)

누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께서 공생애의 첫 가르침을 이사야의 예언(61장)을 인용하며 당신의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는 일이 하나님께 위임된 당신의 일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일이 그리스도의 일이라면 또한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 일은 계속 선포되고 성취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는 한 사회에서 신체적, 문화적 특징 때문에 주류 집단 구성원에게 차별을 받으며 스스로 차별 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사회적 배제 집단이라고 정의하며, 사회적 배제를 ‘사회구조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의 박탈과 결핍, 불이익을 당해 사회, 경제, 정치 활동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게 됨으로써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침해당하는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는 차별대우를 받거나 격리됨으로써 빈곤과 박탈감을 동시에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는 장애인, 아동청소년, 여성, 노인, 다문화가정, 탈북주민, 비정규직, 제대군인, 성적소수자, 병력자 등을 포함합니다. 2019년 <시사IN> 연구조사에서는 20대 남성들도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대적인 박탈감과 사회적 배제를 겪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회신학자인 케네스 리치가 그의 책 <사회적 하나님>에서 강조했듯이 신약에서의 교회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세상의 모든 삶과 가치에 도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회적 관심이란 단지 여리고 도상에서 사고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만이 아니라 더 이상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새로운 고속도로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질서,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과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이 일에 협력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회적 약자가 교회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도 사회적 약자가 그러한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과연 이 일들을 지금의 우리 교회가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와 영접에 대해 자주 강조하지만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가 나를 이롭게 할 친구일지, 또는 나를 해칠 원수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성목회자로 개척교회를 시작할 무렵에는 새벽기도 시간에 밖에서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겁이 덜컥 났습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한 사람이 소중하고 반갑기도 하지만 모두 반가운 건 아닙니다. 그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두려움을 내려놓고 낯선 이를 환대를 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고 용기입니다. 이건 은총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교회공동체는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 중 어떤 이들을 환대할 수 있으신가요? 또는 교회공동체가 환대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 그들이 배제나 차별을 당하지 않게는 할 수 있으신가요? “나는 저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로 인정할 수 없어.” 하며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오래된 상가 건물 2층에 있는데 휠체어를 위한 경사로도 없고 엘리베이터도 없습니다. 지하철에서 교회까지 오는 길의 보도블록도 굴곡이 많아서 지체장애인이나 노약자 분들이 다니기는 많이 불편합니다. 마음으로는 환대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환대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면 낯선 이를, 나와 다른 이를 단번에 환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환대에 대한 지향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만나 극진히 대접했던 나그네들은 바로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천사들은 사라에게 아들을 잉태하는 축복을 내립니다(창18:1~15). 엠마오 길을 가던 제자 두 사람이 함께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초대하여 묵게 하고 음식을 대접했던 낯선 이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눅24:13-35). 하나님은 낯선 사람, 나그네의 모습으로, 사회적 약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나그네를, 사회적 약자를 환대하는 일이 교회의 사역인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성해방신학자이자 이스트할렘가에서 직접 목회를 하며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의 파트너가 되어 하나님의 파트너쉽을 실천한 레티 러셀은 <공정한 환댸>에서 교회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낯선 자들과 동역자가 되고, 그리스도가 환영한 사람들을 환영하는 것이고, 이리하여 사람들이 종교적 배경, 성별, 인종별, 종족별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낯선 자들과 동역자가 된다는 말이 인상적인데, 환대는 약자에 대한 일방적인 호의나 돌봄이 아니라 쌍방향의 상호간 목회로서, 서로 역할을 바꾸어도 보고, 서로를 통해서 최대한 배우는 일입니다.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수행해나가는 교회일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에 바탕을 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에베소서에 기록된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엡4:15~16)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경지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면, 교회가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장은 교인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각각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까지 다다르는 것,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 복음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교회갱신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는 로빈 마이어스는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을 만큼 중독되고 마비된 것인가? 교회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어야만 다른 것이 대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한 번 더 예수를 찾아 나서야만 하는가?” 그는 오늘날과 같은 전 지구적인 위기 속에서 기독교가 희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개인의 영혼구원과 물질적 번영에 사로잡혀 믿음을 거래로 둔갑시킴으로써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전과 체제변혁적인 실천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예수를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살아내고 예수를 닮아가는 공동체로 바뀔 수 있을까요? 교회가 단순히 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깨어진 세상 속에서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될까요? 깊은 성찰과 회심, 영성의 회복이 필요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주님의 뜻을 경청하는 교회

세이비어 교회의 성립자인 고든 코스비 목사는 “내적인 영성과 영성의 외적인 표출로서의 외적인 사역, 그리고 사랑과 책임있는 공동체에 중점을 둔, 작지만 밀도있게 헌신하고 훈련된 사람들의 모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리더들이 참된 존재가 되어야 하고, 교회는 자신이 존재하는 지역사회를 섬겨야 하며, 각 지역의 교회들은 함께 사역해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세이비어 교회는 백 오십 여명 정도의 교인으로 거대한 미국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교회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자, 소외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이 세이비어 교회의 중심사역입니다. 저임금 가족을 위한 주택보급사역, 빈민지역 주민들과 실업자, 노숙자, 마약중독자, 알콜중독자들의 치유와 재활을 돕는 활동 등 7개 분야에서 70여 가지 연관된 사역을 활발히 진행하는 역동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런 모든 사회적 활동에 앞서 무엇보다 관상의 삶(contemplative life)을 강조하며 내적 훈련을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상의 삶은 매 순간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님과 더 깊은 연합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삶의 지향입니다. 깊은 내면의 여정으로 인도되면서 자기중심성과 스스로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을 훈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상적 삶과 사회 변혁이 함께 갈 수 있을 때 진정 하나님나라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적 성장과 속도,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며 마치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듯이 현혹되어 갑니다. 이런 속에서 관상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속도를 줄이고 멈춰야 합니다. 팬데믹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했습니다. 이제는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해서, 탐욕을 축복이라 속이며 이기심을 부풀려왔던 우리들의 기도에 대해서,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만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뭔가를 성취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기혐오에 대해서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교회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앉아 그분의 뜻을 묻고 경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와 두려움 없이 낯선 이들을 환대할 수 있는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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