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 산하 속회연구원(박동찬 이사장, 지광식 원장)은 2022년 9월 11일부터 23일까지 13일간의 일정으로 ‘존 웨슬리 헤른후트 방문 여정 탐방’을 진행했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체코를 경유하는 이번 일정은 존 웨슬리가 모라비안교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떠났던 여정을 찾아가면서 종교개혁과 문화를 함께 접하는 일정을 설정했다.

얀 후스는 루터보다 약 100년 앞선 인물로 보헤미아 종교개혁자이며 신학자, 프라하 카를 대학 학장과 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며 우리에게 카를교로 알려진 카를의 다리 근처 베들레헴 교회의 주임사제를 겸했었다. 그는 보헤미아 지역에 전파됐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토대로 가톨릭교회에 맞서 교회의 세속화를 비난했다. 이에 교황청은 콘스탄츠종교회의에 소환해 1415년 7월 6일 이단선고를 하고 화형에 처했다. 체코에서는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 날을 ‘얀 후스 기념일’을 지정하고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얀 후스가 화형에 처해지고 그를 추종하던 신앙인들 중 보헤미아 지역 사람들과 모라비아 지역의 사람들이 지금의 독일 지역(당시 작센 지역)을 비롯해 유럽의 곳곳에 가톨릭 교회를 피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자 흩어졌으며 이들 중 일부가 헤른후트로 넘어가 진젠도르프 백작 사유지에 정착하고 후에 헤른후트 형제단 교회를 만들게 되는 역사가 된다. 지리학적으로는 모라비아지역이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모라비안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자 가톨릭교회를 피해 떠나면서 보헤미아 지역을 거치면서 이들이 함께 독일과 인근 지역으로 이동 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 보헤미안이라는 의미를 집시나 자유로운 행위자들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보헤미안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가톨릭교회의 억압과 핍박을 피해 유럽 각지로 도망치듯 삶을 살아야 했던 고난의 길을 택한 신앙인들이었고, 보헤미안들의 역사적, 신앙적 모습이 훗날 예술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면서 보헤미안이라는 의미가 지금의 의미를 갖게 됐다.

체코 남보헤미아주에는 얀 후스를 추종하던 후스파의 급진 세력이 군사적 요충지로 건설한 소도시 타보르(陣地라는 뜻)가 있다. 계곡을 건너 산에 건설된 이 도시는 얀 후스가 화형당하고 난 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곳이다. 가톨릭교회는 이곳에 수차례 십자군을 보내 공격했으며 그럴 때마다 번번히 십자군이 패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이나 화재가 빈번하게 되자 각자의 집 지하에는 식량저장 겸 창고, 반공호 개념의 지하굴이 있다. 지하굴은 실제로 전쟁이나 화재로 인해 도시가 파괴됐을 때 총 10여 년간 사람 뿐 아니라 가축들도 땅굴에서 함께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시에서 땅굴들을 이어 반공호로 만들었으며 그 길이가 약 13km정도로 현재는 얀 후스 박물관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얀 후스와 그를 따르던 신앙인들의 선택은 훗날 헤른후트 형제교회(모라비안교회)를 탄생시켰고, 존 웨슬리에게 사회적, 신앙적 영향을 주는 나비효과를 가져왔으며, 체코를 비롯한 인근에 많은 영향을 줬다. 그 당시 금속활자가 좀 더 빨리 만들어졌다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아닌 얀 후스의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에 퍼졌을 것이고 이는 세계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상상을 가져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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