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순간 감사제목을 떠 올린다
분노의 순간 감사제목을 떠 올린다
  • 이구영
  • 승인 2022.09.16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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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최대의 고통스런 질병은 문둥병이었습니다. 이 문둥병은 한번 걸리면 치유의 가능성이 낮고, 전염성이 강해서 격리를 시키는 병이었습니다. 미리 산 사람 놓고 장례식을 치른 후에 구덩이나 깊은 골짜기 같은 곳에 사람을 내려놓고 그곳에 음식을 던져주며 살게 하던 치명적인 저주의 질병인 문둥병!

예수님 당시 갈릴리지방과 사마리아지방의 경계선 즈음에 문둥병자 집성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근처를 지나시게 되자. 소문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던 문둥병자들 중에 10명이 예수님을 멀리서 부르고 있었습니다.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이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지만 멀리서서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부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래서 그들은 불치의 병이 나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 격리 수용소에서 나와 출발을 했습니다.(당시 제사장들은 환자의 병이 문둥병인지 아닌지를 진단해주던 일을 했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병이 고쳐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단 출발을 했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는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문둥병이 나았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와! 진짜 우리들의 몸이 나았다. 고쳐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다시 찾아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들이 갈 곳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인사를 드리러 온 문둥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또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이야기를 가만히 읽다보면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9명의 사람들은 감사하다고 예수님께 감사표현을 하지 않았을까요?
① 감사하는 것을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② 감사가 없는 두 번째 이유는 하기 싫어서입니다. 감사는 배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인사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헌신하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나 싫으면 그만입니다.
③ 보편성의 법칙 때문입니다. 나만 고쳐진 것이라면 감사하겠지만, 다 고쳐졌기에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편성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④ 우연히 나았다고 생각하니까 감사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연은 진화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감사의 대상이 없으니 감사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⑤ 분노가 차올라서 감사가 안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둥병이 고쳐진 순간 그동안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 나를 버린 사람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복수심이 생겨나면, 감사는 없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문둥병자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눅 17:15-16]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다와 갈릴리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던 시절에는 북쪽 나라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도시입니다. 앗수르라는 나라가 침략을 해 와서 나라가 무너졌고 앗수르는 사마리아를 앗수르의 도시처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의 신상들이 세워졌습니다. 앗수르 점령군과 이스라엘 여자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혼혈아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혼혈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남쪽 유다는 사마리아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정결하지 못하다고, 순결하지 못하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표현할 때 완성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분노의 상황을 감사로 변화시킵니다. 분노의 순간일 수 있지만 그 분노를 감사로 감싸 버렸습니다. 우연을 섭리로 받아들입니다. 배운 대로, 믿음대로 삶을 만들어갑니다. 믿음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믿게 되는데, 그는 믿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결국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너는 육적인 치료, 육적인 문제 해결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서도 해결 받고 구원받았으니 그렇게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축복해주십니다. 10명 모두가 문제해결을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전인적인 구원, 영과 혼과 육의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질병의 문제, 가난의 문제, 사업의 문제, 관계의 문제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 친근감의 문제, 대화의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영과 육의 조화와 균형, 온전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육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영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는 9명의 문둥이처럼 구원에는 이르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날 치료받은 사람은 10명이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한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믿음의 눈을 떠서 감사를 표현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과 육이 모두 건강해지고 구원에 이르는 계절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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