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전행 KTX안 여성을 보면서
어제 대전행 KTX안 여성을 보면서
  • 민돈원
  • 승인 2022.09.06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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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서울을 갈 때면 종종 빠르고 시간대에 정확한 지하철을 이용한다. 그런데 탈 때마다 다음과 같은 불청객이 찾아온다. 그의 목소리는 이렇다. “...정부의 코로나 방역지침 준수에 따라 지하철 내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로 시작하는 식상한 방송 멘트이다. 이어서 :...승객 여러분께서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착용시는 입과 코를 가려 ... 마스크가 없는 승객은 다음역에 정차하여 마스크를 구입한 후 승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시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거나 과태료가 부과된다“ 는 등의 소음에 가까운 방송을 거부하지 못한 채 듣게 된다. 더욱이 긴 구간을 승차해야 하는 경우에는 짜증이 날 정도로 정차역 수만큼 반복해서 이른바 강제적인 삼중고-마스크 착용해야 하는 고통, 방송 멘트를 매 역마다 들어야 하는 고통, 위반시 멘트로 협박 당하는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지난 2020년 11월 마스크 의무화 이후 실내는 해제될 줄 모르고 2년째 되어간다. 다만 지난 5월부터 실외에서의 강제 착용은 이미 해제되었다. 그러나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거의 90%이상이 착용한 자들이다. 전 국민 마스크 강제 착용은 검증도 희박하고 큰 효과라고 하기에도 미흡한 미완성 실험에 불과함이 현재 보여지고 있는 결과가 증명한다. 강제하니까 착용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 비가 오지 않는 맑고 화창한 날에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과 흡사하다. 이를 두고 혹자들은 ‘방역미신, 방역독재, 마스크 미신’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와 백신은 가공할 무기로 둔갑했다. 이들로 대한민국 국민을 평준화시켜 버렸다. 심지어 마스크 미착용자를 범법자 취급까지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반사회적 인간으로 비난받게 만들어 매도하는 일 조장하기를 지난 정권은 서슴치 않았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는 마스크가 감염 예방 효과가 뛰어나다는 살증적인 전제조건을 반드시 충족해야만 과학적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전 국민 100% 착용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연일 수십만 명이 확진되었고 어느 날에는 하루에 60-70만 명 오르락내리락했던 적이 있다. 2022. 9.5 현재 확진자 수가 23,606,740이나 된다. 미파악된 수를 감안하면 국민의 반 이상이 확진자가 된 셈이다. 즉 마스크가 감염 예방 효과가 있다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이런 부조리, 불합리로 설득력을 잃었음에도 강제로 밀어붙였다. 그래서 더 가공할 융단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백신 강제접종이다. 2021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 백신을 맞으면 마스크를 벗는다.고 당시 정권은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말을 바꿈으로써 이 역시 거짓으로 드러났다. 백신 접종의 유무에 상관없이 접종 전보다 확진 환자 수는 늘어만 갔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리어 마스크를 벗는 집단 국민의식이 일어날 때 백신 무용론이 더 사리에 맞고 국민 위화감도 줄어들 수 있다. 라고 하는 게 정설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지난해까지 식당 출입 시간 및 인원 규제할 때의 어처구니없는 넌센스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다 금년들어 식당 규제가 완전히 풀리자 맛집들이 문전성시다. 그런데도 이른바 ‘마스크 미신’은 여전하다. 먹을 때는 벗고 먹지 않을 때는 쓰라고 갑질하는 식당 종업원, 마치 마스크 벗고 음식먹을 때는 코로나 위험이 없고 음식 대기할 때는 코로나 위험이 있다는 궤변이 아니겠는가? 멀쩡하던 사람이 백신 맞고 바로 그날 죽었는데도 인과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공무원, 마스크를 쓰고서 집회에서 자유를 외치는 시민, 백신 맞고 죽다시피 하다 살아나면서 또 다시 백신을 4차까지 맞는 사람, 등 납득하기 힘든 이율배반적인 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마스크 얘기를 한 번 더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9.5) 대전에서 우리 감리회 거룩성 회복을 위한 기도회 및 세미나가 있는 날인지라 KTX를 타고 가는 열차 안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한다. 내 좌석은 비교적 빈 좌석이 많아 보이는 17호칸이었다. 나와 인접한 네 좌석은 운행 내내 한 명만 타고 있었다. 내 바로 앞 승객이 아마 마스크를 벗고 통화한 것을 본 가운데 통로 맞은 편 뒤쪽 한 젊은 여성이 주시했나 보다. 얼마후 그 남성과 비교적 사이가 떨어져 있는 그 여성이 다가와 ‘마스크를 제대로 쓰세요. 아까부터 기침도 하고 있었잖아요’ 못마땅하듯이 일침을 주었다. 나는 그 젊은 여성의 담대함에 놀라 몇 번이고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내 입에서 이렇게 탄식조로 실소를 금할 수 없어 중얼거렸다. ‘참. 대단한 여자네, 아휴, 참 ...!’

단속요원이라 해도 수용하기 힘든데 한 참 떨어져 있는 같은 승객이 아마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고 불안해서였는지 마스크 착용을 강요하는 그같은 용감한(?) 행위에 박수를 보내기보다는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일은 비단 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같은 국민으로서 실내에서 종종 일어나는 우리나라 마스크 법제화로 인한 슬픈 자화상이다. 내 사생활이 누군가에 의해 허울좋은 공익이라는 굴레 씌워놓은 이름으로 감시당하고 침해당한다는 사실은 비본질이 본질로 둔갑한 건강한 사회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뉴노멀 시대니 팬데믹 세상이니 위드 코로나니 라는 신조어가 일상화되어 가는 세상이라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메마르고 사나와진 나머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공격본능의 인간으로 전락할 수는 없진 않은가? 우리 인간은 어떤 피조물과 다른 하나님의 이미지로 빚어진 걸작품(포이에마)이기에 훼손되지 않는 절대진리로 무장하여 자유롭게 행하되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그 존재가치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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