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궁금합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궁금합니다.
  • KMC뉴스
  • 승인 2022.09.0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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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열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궁금합니다.

이성호 교수(연세대학교)

요즘 애완동물/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분들은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반려동물의 구원과 천국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예배는 가능한지요, 그러한 예배가 가능하다면 반려동물이 죽음을 당했을 때 장례예배는 어떻게 해야 하며 구원과 천국문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요?

질문자님은 반려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신 분이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말씀하신 대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에게 반려동물은 가족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신앙인들은 마음 한 구석에 ‘나에게 그토록 소중한 반려동물은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일까?’, ‘구원의 하나님이 반려동물도 구원하실까?’와 같은 질문들을 갖게 되기 마련이죠.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기 전에 자신이 아닌 존재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질문자의 질문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네요. 첫 번째는 반려동물과 인간 문화이고, 두 번째는 반려동물의 구원 문제이며 세 번째는 반려동물과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1. (반려)동물과 인간 문화

질문에 언급해 주신대로 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반려동물 키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1 한국 반려동물 보고서’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604만 가구로 이는 2019년보다 47만 가구가 증가한 것이라 합니다. 반려견은 약586만 마리이고 반려묘는 211만으로 반려동물 천 만 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려동물을 존중하는 마음도 커지고 나아가 동물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통계는 유기동물의 현황입니다. 유실되거나 유기되는 반려견과 반려묘는 2015년 약 8만 2천 마리, 2016년 9만 마리, 2017년 10만 3천 마리, 2018년 12만 천 마리로 점점 증가 추세입니다. 반려동물을 진짜 가족으로 생각했다면 어떻게 버릴 수 있었을까요? 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반려동물을 키우다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난감에 흥미가 떨어지면 쉽게 버리듯이 말이죠. 반려동물은 여전히 버릴 수 있는 애완동물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반려 동물을 인간이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처럼 취급하는 태도는 굉장히 오래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그 대상은 동물 전체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반려동물 문제를 고민하기 전에 반려 동물 외에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인간 사회에서 받는 부당한 처우와 고통의 현실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물실험과 공장식 축산업인데요.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다양한 실험들에 사용되고 있죠. 질병치료용 의약품 개발과 같은 공공선을 위해 동물 실험이 불가피하더라도 되도록 동물실험을 대체(Replacement)하고 줄이고(Reduce)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실험을 개선(Refinement)하는 3R 원칙이 이미 1959년에 제시되어 지키도록 권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2014년에 약 241만 마리의 동물들이 동물실험에 사용되었고 2018년에는 약 372만 마리가 실험에 사용되어 국제사회의 권고와 달리 동물실험의 양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한편 현대 공장식 축산업 시스템을 통해 수많은 가축들은 비인도적 환경 속에서 고통스럽게 생활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갑니다. 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진 기원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었지만 19세기 이전만 해도 가축들은 들판에서 방목되거나 넓은 농장에서 생활했지요. 전통사회에서 가축들은 인간에게 고기와 우유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농사에 큰 부분을 차지했기에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고 여러 종교들의 종교적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축들은 더 많은 고기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공장의 재료이자 부속품에 불과하죠. 대규모 밀집방식으로 사육되기에 스트레스로 인한 상호 공격을 막기 위해 부리 자르기, 꼬리 자르기 등이 업계의 관행입니다. 더불어 밀집 사육을 당하는 가축들은 비위생적이고 감염에 취약한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축산업자들은 이를 막고자 가축들에게 대량의 항생제를 투여합니다.

17-18세기에는 정말로 동물을 기계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물을 해부하는 연구를 할 때 마취 없이 동물의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동물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지르는 소리를 기계음이라 여겼다지요. 그렇지만 당시에도 동물이 해부될 때 내는 소리를 고통의 신음으로 듣고 이를 반대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이들 가운데 상당수의 종교인들이 적극적 역할을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824년에 영국 동물학대방지협회를 창립한 아더 브룸(Arthur Broome)은 성공회 사제였고 매닝(Manning) 추기경이 생체해부 철폐운동의 적극적 후원자였습니다. 학대 받은 말의 이야기를 담은 『검은 말 이야기』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애나 슈얼과 같은 퀘이커 교도들은 동물실험을 강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마취 없이 동물을 해부하기도 했던 동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에 들어와 동물들의 숨겨진 능력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물 행동학이라는 분야는 동물들이 인간처럼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동료 동물들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들만의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동물권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이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은 동물 실험이나 공장식 축산업 현장에서 동물들이 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고 동물 실험과 축산업의 관행이 동물에게 비인도적이고 폭력적 행위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물행동학자들과 동물권 철학자들은 동물에게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갈 삶의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반려동물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가축이나 실험동물에 비해 반려동물이 훨씬 더 나은 배려와 존중을 받는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반려동물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중성화 수술, 꼬리 자르기 등의 신체 변형을 겪고 있고 종의 특성에 맞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자들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동물들이 겪는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도울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동시에 반려동물 가족 분들도 반려동물의 범위를 넘어 전체 동물의 복지와 윤리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2. 동물과 구원

반려 동물의 구원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앞에서처럼 반려동물과 여타 동물에 대한 특별한 구분 없이 말씀드려보려고 합니다. 동물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그래서 천국에 갈 수 없다’ 혹은 ‘동물은 의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능력이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의 구원을 협소하게 이해한 것입니다.

우선 구원은 창조와 함께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구원은 본래적 창조의 회복이라고 표현되기도 하고 ‘새 창조’라고 말해지기도 하죠.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있지만 그 복잡한 논의는 제외하고 분명한 점은 창조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분명 동물들을 각각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처럼 동물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래서 옥스퍼드 대학 신학자이자 평생 동물윤리와 동물신학에 헌신한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는 동물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신적 권리(theos-rights)”가 주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출애굽의 이야기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 성서 이야기들이죠. 그런데 여기서도 방주와 출애굽 무리에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과 가축들이 포함되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동물들을 구원의 여정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논리적으로도 더 어색해 보입니다.

신약에 오면 예수를 통해 드러난 구원 이해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요. 때때로 ‘하나님 나라’의 한자식 표현인 ‘천국’에 대한 기존 통념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서의 이해가 오해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원문 뜻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의 다스림’(the rein of God)이 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외우는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come)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라고 말한 것처럼(고전 15:23) 기독교가 믿는 구원의 최종 모습은 몸의 부활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죽은 후에 몸은 사라지고 그 영혼만이 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는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 사상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구원이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몸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 세계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과연 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창조 세계에 동물들은 포함이 될 수 있나요? 대답은 긍정적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노아의 방주와 출애굽 이야기 외에도 구원과 연관되는 말씀에 동물이 포함되는 성서 말씀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있는데요. 먼저 골로새서 1장에서 바울 사도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17절에서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 만물을 지탱하고 지키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만물의 정의상 만물 안에는 동물이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음을 주목해 보세요. 말씀이 다르게 읽힐 겁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그리스도가 보호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탄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열망하는 존재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마지막 사례는 이사야 11장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을 초식 동물들과 육식동물이 함께 어울리고 어린 아이와 동물들이 뛰노는 세계로 묘사하고 있죠. 그런데 이 말씀을 기독교의 종말론적 새 창조(New Creation) 관점에서 본다면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평화롭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만이 구원받는 통상적인 생각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해보세요. 어떠한 모습일까요?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 산, 강, 바다도 없이 인간만이 가득한 세상이 과연 조화롭고 아름다울까요?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훨씬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3. 동물과 함께 드리는 예배 및 장례 예배

이제 마지막 질문에 답을 드려보도록 하지요. 가족과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권면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코이노니아(친교)로서의 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반려동물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예수님은 아직 덜 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던 아이들을 반겨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라고(막 10:15) 말씀하셨지요. 아마 예수님은 반려동물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요? '동물들이 내게 나아오는 것을 막지마라. 그들도 내가 창조하고 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반려동물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에는 아직 그러한 사례가 많지 않으니 반려동물 문화가 정착된 지 오래된 서구 기독교의 사례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동물 축복식(A Service for the Blessing of Animals)입니다. 이 축복식은 세계의 여러 기독교 종파들의 교회들에서 세계동물의 날이자 동물과 자연들의 성인으로 불리는 성 프란시스코 기념일인 매년 10월 4일에 거행되는데요. 목회자는 성도들이 데리고 온 동물들(주로 반려동물들)을 축복해주는 의식을 진행합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형제교회인 미국연합감리교회도 동물 축복식을 가지며 연합감리교회 장정(The Book of Discipline)에 이 예문이 실려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교회 현장에서 적용할 때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반려동물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 지속적으로 교회에 의견을 표시하고 요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로부터의 목회적 요구가 있을 때 목회자들도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반려동물이 없는 성도들의 동의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동물 알레르기가 있는 성도나 동물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 교회 공동체 내 반려동물문화 정착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회실과 함께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한편, 반려 동물들의 입장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반려 종의 특성이나 해당 반려동물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 일부 반려동물들은 예배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불안해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각 교회 상황 따라 독립된 공간에서 반려동물 가족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반려동물이 죽게 되면 함께 살던 이들은 인간 가족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실감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심지어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이라고 불리는 우울증에 빠질 위험도 있다고 하죠. 장례예배가 가지는 중요한 목회적 의미는 가족을 잃은 성도를 위로하는 일입니다. 반려동물 장례도 그러한 목회적 차원에서 필요합니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이들도 장례 예배를 통해 신앙적 위로를 받고 삶의 의미를 되찾아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이미 반려동물장례사, 반려동물 화장장 및 납골당 등의 반려동물 장례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 차원뿐만 아니라 실질적 차원에서도 한국 교회 상황에 맞는 반려동물 장례예식과 예문이 필요합니다. 향후 국내 예배학자들의 공헌을 기대해 봅니다. 질문자께서 참고하시라는 차원에서 동물신학자 앤드류 린지가 작성한 동물 장례식의 기도문을 여기에 담아두겠습니다.

순례자 하나님

우리와 함께 여행하시는 분

이 세계의 기쁨과 그림자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슬픔 안에서

우리의 고통을 어루만지소서.

비통함 없이

희망을 가지고

죽음의 신비를 받아들이도록 도우소서.

이 세계의 그림자들 가운데서

삶의 혼란과 죽음의 공포의 한복판에서

당신은 우리 곁에 서 계시며

항상 축복하시고, 늘 두 팔 벌려 안아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이 신비를 깊이 생각할 때

당신께서 ○○○에게 생명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그/그녀를 당신의 사랑의 손에 맡깁니다.

온유하신 하나님

당신의 세계는 깨지기 쉽고,

당신의 피조물은 섬세하며,

우리 모두를 낳으시고 구원하시는 당신의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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