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성찬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 KMC뉴스
  • 승인 2022.08.1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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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일곱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성찬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나형석 교수/협성대)

교회공동체에 속하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찬에 참여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궁금한 내용이 있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성찬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성찬집례는 목회자가 하던데 반드시 목회자가 해야만 하는 건지요? 초대교회를 생각해보면 직분이 도입되기 전에도 애찬을 나누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예배 마지막에 축도도 성직자가 하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요?

1. 성찬(마 26:26-29, 막 14:22-25, 눅 22:15-20, 고전 11:23-26)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중복되긴 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성찬의 의미가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찬에 붙여진 이름들, 은혜의 수단, 성찬의 순서.

첫째, 성찬은 “주님의 만찬”(Lord’s Supper)으로 불립니다. 이는 소위 “마지막 만찬”(Last Supper)과는 다릅니다.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통해 우리 구원의 샘과 중보자 그리고 마지막 심판자가 되실 분, 그럼으로써 우리의 주님(Lord)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적 유익(대속의 공로와 성령)을 교회에 나누어주시는 곳입니다.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라고도 불립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분과의 연합 안에서 한편으로는 우리와 아버지 그리고 다른 한편 우리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과의 사랑의 능력이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 매일의 양식이란 이제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순종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사신 대속의 의와 삶의 순종을 통해 아버지의 의를 만족시키셨던 그리스도의 거룩한 내적 성품의 의가 매일의 양식으로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이 양식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메말라가고 결국 영적 아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떡을 뗌”(breaking of bread)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찢긴 몸과 흘려지는 피로 인한 영적 유익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둘째, 성찬은 매우 중요한 은혜의 수단에 속합니다. 은혜의 수단은 다음과 같은 여러 주제어를 따라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외적 수단, 은혜의 내용, 은혜의 출처, 은혜의 목적, 은혜를 받기 위한 합당한 자세.

성찬에서 은혜의 외적 수단은 떡과 포도주입니다. 이 수단은 주께서 직접 사용하사 지정해 놓으신 것인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고 설명해 줍니다. 이 외적 수단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 혹은 선물은 죄의 용서 그리고 우리를 내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시켜 주시는 성령입니다. 이런 은혜의 출처 혹은 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용서하시는 은혜와 성령의 선물이 성찬을 통해 주어지는 목적은 우리를 내적으로 외적으로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닮아가게 하며, 혹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찬에서 은혜를 받기 위한 합당한 자세는 회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웨슬리는 구원과 성화의 은혜와 함께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수단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은혜의 수단에 매여 계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혹은 그것 없이도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이 자리 혹은 수단을 지정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찬의 자리에서 그분과 그분의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 성찬예식의 순서를 통해 성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성찬에서의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왜 하는 것입니까? 성찬은 네 가지 행위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a. 드사(taking), b. 감사기도 하시고(giving thanks, blessing), c. 떼어(breaking of bread), d. 나누어 먹는다(communion).

성찬에로의 초대, 회개, 위로를 주실 그리스도께 안내 받은 후 교회는 a. 떡을 들어 아버지께 보여드리며 b.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사 거듭나게 하시고 지금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사랑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현실은 시험과 유혹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감사는 이제 간구로 바뀝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께서 이제 그 구원을 보전해 주시고 더욱 온전히 이루어주십사라는 간구입니다. 이 일을 위해 교회는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쟁투하는 교회를 위해 성찬을 제정하시고 이곳에서 은혜 베풀 것을 약속하셨음을 아버지께 구하며, 아들을 보사 아들의 약속대로 은혜 베풀어 주십사고 구합니다. c. 이제 집례자는 은혜의 매체가 될 떡과 포도주를 회중에게 보입니다. d. 그리고 떼어 나누어주어 먹게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분의 찢김과 그분의 흘려지는 피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먹고 마신 후 교회는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존재와 몸과 소유를 아버지께 올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상처와 피와 하나된 우리를 아버지께서 정하게 하시고 아들과 함께 아들의 거룩한 품성, 거룩한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을 구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랑의 수고와 인내를 통해 세상에서 견디고 승리하여 훗날 재림의 그리스도 앞에서 마지막 칭의를 얻은 후 사랑의 거룩한 예복을 갖추고 하나님 나라 그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성찬초대사를 통해 회개하고 사랑의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은혜받고자 하는 자들만이 성찬에 초대받습니다. 그렇게 초대받아 이제 용서와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비로소 교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채워져 사랑의 거룩한 삶의 실천을 위해 세상으로 보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성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2. 성찬집례는 반드시 목회자가 해야만 하나요?

첫째, 신학적으로 말해 반드시 안수받은 목사가 성찬을 집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반드시 안수목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회중에게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의 경우에서처럼 그런 절대적 “반드시”를 역사적 신앙공동체의 상대적 교회 제도와 룰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요. 반드시 안수목사가 집례해야만 성찬의 은혜가 회중에게 전달되고 유효하게 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위한 은혜의 샘, 그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분, 그 은혜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분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구원 사역의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성찬과 같은 중요한 은혜의 수단을 통해, 혹은 그런 수단 없이도, 성찬을 집례하는 거룩한 성직자를 통해, 때로는, 부패한 성직자의 손과 입술을 통해서도 은혜를 베푸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성찬집례는 반드시 안수 목사가 해야 된다고, 성찬의 은혜는 반드시 안수목사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회중들이 성찬을 안수받은 목사에게 위임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11:17-34)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찬실천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명령을 소개하면서 성찬에 약속된 은혜,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합당한 자세, 성찬공동체 안의 평등과 사랑, 잘못된 성찬이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에 끼칠 해악에 대해 염려합니다.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이 성찬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논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은혜 앞에 회중을 세우는 이 성찬의 자리에 대한 이해, 합당한 자세에 대한 교육, 성찬이 가져다 줄 영적 성장에 대한 영적 지도자로서의 간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귀한 은혜의 수단을 잘 이해하고 회중에게 교육시키며 이 수단을 회중에게 유익한 식으로 제공할 수 있는 자들의 자격과 성품에 기준을 세우고 안수를 주어 저들로 교회를 위해 은혜의 수단을 준비하고 사용하도록 권한을 위임하게 된 것입니다.

감리교는 목회자에게 안수를 통해 말씀과 성례(세례와 성찬)의 사역에 대한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줍니다. 감리회 목사 안수식 서문은 목사직이 “성례를 행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으며 (새예배서, 285) 안수예식 감독과의 문답 제 2항은 안수 받을 이에게 과연 그가 “성심으로 그리스도의 도리를 가르치고 성례를 베풀며 그의 교훈을 항상 준행”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새예배서, 290). 후보자에게 안수하며 감독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옵소서. 저들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행함으로 교인들을 위로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항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게 하옵소서”(새예배서. 292).

3. 성찬집례는 목회자가 하던데 반드시 목회자가 해야만 하는 건지요? 초대교회를 생각해보면 직분이 도입되기 전에도 애찬을 나누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이 전제하는 사실들을 가지고 제 나름대로 위의 질문을 다시 써보았습니다. “애찬(love feast 혹은 agape meal)과 성찬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아니 역사적으로는 애찬이 성찬에 앞서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성찬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는 애찬이 초대교회에 직분이 도입되기 전부터 행해졌을 것이라 추론되는데 그렇다면 직분자 없이 진행되었을 애찬의 역사적 발전 형태라 할 수 있는 성찬은 왜 반드시 목회자가 집례해야만 하나요?”

첫째, 애찬과 성찬이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물론 식사와 교제라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의 형태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두 의식은 모임의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처음부터 독립적이었으며 잠시 혼재해 있었으나 곧 자신의 특성에 따라 발전해나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듯 성찬은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명령에 근거하고 있으며 제정사가 약속한 식사의 성격(그리스도의 몸과 그 유익을 먹음) 그리고 이 성례를 돌볼 성직자가 관련된 바 역사적 그리스도교 주일예배의 기본 구조로 발전해갔습니다. 반면 애찬은 주일예배의 자리로서 보다는 그리스도인들 간 사랑의 표현, 상호격려, 사랑의 증가를 목적한 모임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성찬과 달리 그리스도교 초기에 역사적으로 사라졌는데 1727년 진센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단이 함께 음식, 기도, 종교적 대화와 찬송을 나누는 작은 집회를 소개하면서 근대적 모습으로서 애찬은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둘째, 애찬이 초기 교회공동체의 의식(ritual)이었다면 비록 그것이 오늘의 성직제도에 상응하는 것은 아니라해도 당대 나름의 영적 리더십과 직분에 의해 운영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공동체,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심화시켜 줄 스토리와 의식(ritual), 그리고, 그런 스토리와 의식을 보존하고 해석해 주는 영적 직분 시스템은 그 이름과 형태가 무엇이든 늘 함께 얽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직분이 도입되기 전에 애찬이 있었다는 가정은 따라서 역사적인 실례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셋째, 감리교의 경우 성찬과 달리 애찬은 반드시 안수받은 목사를 집례자로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이 모임의 성격과 과제에 대해 소개받고 훈련받는다면 평신도 리더들에 의해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애찬이라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감리교회 안에서의 애찬은 존 웨슬리 목사의 소개와 실천으로 시작되고 확대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 사바나에서 모라비안들의 애찬에 참여하면서 애찬을 처음 경험합니다(존 웨슬리의 일기. 1737년 8월 8일). 후에 그는 이 애찬을 사랑의 거룩한 공동체 형성을 과제로 하는 감리교 운동의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도입했습니다: “감리교 소사이어티 안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을 증진시키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듯 우리가 함께 기쁨과 전심으로 ”떡을 먹는 것“(eat bread)이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초기에 사용되었던 음식의 종류와 그런 모임에 붙여졌던 애찬이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이 애찬에서 나눈 음식은 작고 평범한 케익과 물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곳에서 ‘사라질 양식’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게 할’ 양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모임을 파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존 웨슬리 ”메도디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평이한 설명“ 1748). 웨슬리 생애 중 행해졌던 전형적인 애찬순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찬송, 기도, 은혜(찬송), ‘떡’을 나눔, 가난한 자를 위한 모금(collection for poor), 애찬컵 (loving-cup)을 돌림, 인도하는 사역자 [감리회운동에 참여했던 웨슬리 같은 영국국교의 안수받은 목사 뿐 아니라 감리회 운동의 평신도 설교자들]의 안내에 따른 참여자들의 간증들(주께서 내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한)과 찬양, 소리내어 기도하기, 찬양, 사역자의 폐회의 말, 찬송, 축도. 애찬은 안수받은 목사에게만 성찬집례를 허락했던 웨슬리의 영국 내 감리회 운동에서 안수받지 않은 평신도 설교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형태의 모임이었습니다. 또한 미국 감리교회에서도 초기 안수받은 목사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분기에 한 번 순회안수목사(circuit rider)가 지역을 방문해 성찬을 행하는 상황에서 애찬은 이 기도처 내에서 권사들(exhorter)의 설교와 함께 사랑의 완성을 목적한 감리교회 모임의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애찬은 안수목사가 집례하는 성찬과 함께 나름의 독립적인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예배(성찬이 있든 없든) 후 원하는 경우 소규모 공동체(속회, 청년부, 선교부, 위원회 등)가 애찬의 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가족이 교회의 절기를 지킬 때, 혹은 가족 구성원의 생애주기 의식을 가질 때, 혹은, 신앙의 친구들의 교제(속회 등) 때 이런 감사와 간증과 식사와 기도와 찬양의 형태를 지닌 애찬을 사용하면 좋을 듯 합니다.

4. 마지막에 하는 축도도 성직자가 해야 하나요?

축도를 위해 두 곳의 성경본문이 사용됩니다. 하나는 대제사장 아론의 사제적 복의 기원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예언적 복의 기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첫째, 축도를 성직자가 해야 하나요? 일단 성경에 이 복을 기원한 자들이 제사장 아론과 사도 바울이므로 이런 성경적 사례에 근거해 축도를 성직자의 일로 여기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만일 설교와 성찬이 삼위 하나님의 은혜, 사랑, 교통하심에 대한 약속의 선포 그리고 그 약속의 실현이었다면 이제 한 주를 투쟁하는 교회로서 시험과 유혹 가운데 살아갈 교회를 향해 한 번 더 설교와 성찬의 대주제인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비는 것은 예배의 전체 내러티브의 흐름 상 자연스럽다고 생각됩니다. 말씀과 성찬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복의 기원을 그것을 위임받은 안수목사가 행하는 것에 대한 익숙함, 그리고 그런 실천에 대한 회중의 정서적 공감대 역시 안수목사의 축도 실천을 유익한 관례로 받아들이는데 한 몫했다고 봅니다.

둘째. 사실 감리교회에서 안수목사는 말씀과 성례의 사역에로 위임받았지 축도를 위임받은 바는 없습니다. 따라서 본 질문을 전향적으로 고려할 경우 그런 관례에 묻혀 잊혀질 수도 있었던 중요한 회중의 본질과 사역이 각성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해 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한 자들은 모두 그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참여하여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서로에게 예언자로서 사랑의 율법을 세우고, 사제로서 피차 연약함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왕으로서 모범과 격려를 보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반드시 있어야 될 사역들입니다. 물론 주 중의 삶에서 그러해도 되지만 주일 공예배에서 복의 기원을 안수목사 포함해서 전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삼중직 수행의 기회로 부각시켜 제공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역에 참여해야 하는 회중들의 사명과 자의식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 축도에는 집례자와 회중 서로에게 이 복이 기원될 수 있도록 교독의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집례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회중: 목사님께도 함께, [최근 한국의 어떤 교회의 경우 회중이 서로에게 목례를 하면서] 형제 자매께도 함께. 집례자: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회중: 목사님께도 함께 [형제 자매께도 함께]. 집례자: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회중: 목사님께도 함께. [형제 자매께도 함께]. 가끔 축도에서 자신을 빼는 경우도 봅니다만 이 축복의 교독에는 안수목사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 복의 기원을 하고 받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교독 순서에서 집례자 리스트에 안수목사를 포함해 교회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례 받은자들을 포함시키면 어떨까요. 특히 세례식이 있는 날은 그 날 세례받은 모든 자들이 함께 회중과 이 복의 기원을 나누게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되지 않을까요? 세례 받았다면 어린이, 노인, 장애우, 여자, 타교회에서 온 방문자들을 다 교독의 집례자로 봉사하게 하면 어떨까요. 회중이 반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이 복을 복을 기원해도 좋고 전체 회중이 공동집례자로서 회중 가운데 한 형제나 자매에게 복을 기원해도 좋겠지요. 펜데믹을 지내며 영상을 통한 예배와 그것을 위한 시설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영상을 통해 인도나 캄보디아나 몽골의 선교지 회중과 함께, 오랫동안 요양원에 누워있어 회중의 공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과 함께, 외국에 장기 체류하는 교우들의 가정과 함께, 같은 지역에 있는 감리교회나 혹은 다른 교파의 회중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이 그리스도인의 복의 기원을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어떤 이해와 경험이 생기게 될까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해서 그분의 사랑의 삼중직 사역을 행할 때 교회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회중은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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