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한국교회를 이렇게 바라보았다
10년 전 한국교회를 이렇게 바라보았다
  • 최광순
  • 승인 2022.08.06 12: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미래?

8년 전 쓴 글을 다시 훑어본다. 당시만 해도 교단 내에서 목회자 이중직이 허용되지 않았을 때이다. 현재는 이중직이 허용되었지만, 조건적 법일 뿐이다. 2010년부터 고민하고 어렵게 쓴 글이었지만 당시 기류에는 용납되지 않은 생각이었는지 많은 공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이 시점에 이러한 일들이 현실로 와 버렸다.

작년 비전교회 목회자들 십여 명이 찾아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중 한 젊은 목회자가

“목사님은 기술이 있잖습니까? 기술이 없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10여 년 전 다른 목회자들은 박사학위를 위해 공부할 때, 난 노동의 현장에서 기술을 배우려 뛰어다녔었다. 나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하던 사람들은 이후 박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사이 난 맘껏 도전하는 목회를 하게 되었다.

50세 되던 해에 40세 되던 목사님이 찾아와 뭘 해야 될지를 고민한다. ‘목사님 난 40세에 건축 현장에 뛰어들어 지금 이 자리에 와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앞으로 코로나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시골의 작은 교회는 이제 목회자 가정과 노년 몇이 겨우 예배를 드리고 있고, 시골의 중형교회들은 젊은 교인이 50세 후반이다. 이미 광역시마저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상가교회는 두말할 것도 없고 중소도시의 중형교회는 교인감소가 이제 눈앞에 닥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은 예외일까? 큰 아파트단지가 있는 동네이지만 초등학교 한 학년이 20명 안팎이라고 한다. 한강의 상류인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르면 결국 그 서울의 강도 마를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인구감소보다 정말 무서운 것은 한국의 개교회주의이다. 옆의 교회가 죽든 말든 내 교회만 살면 된다는 생각이 이면에 있다. 현실 밑바닥 교회와 목회자를 걱정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영성’과 ‘거룩’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 대형교회의 웅장한 건축물로 자신의 치부인 양 교회를 자랑하고 외제차와 많은 헌금으로 주변의 땅을 매입하기 바쁠 뿐이다. 정치권에서는 감리사 한 번 해보지 못해 아우성치고, 감독이 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고 돈 봉투 돌리기 급급하다.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장로들은 봉투 챙기기 급급할 뿐이다. 목회 현장에서는 세습금지법이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든 비슷한 크기의 교회로 바꿔주니 말뿐인 법이다. 은퇴할 때는 후임자에게 뒷돈요구는 기본일뿐더러 교회는 빚을 내어서라도 은퇴비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목회 현장이 10년 전보다 더 나아졌을까? 그래도 지금 은퇴하는 분들은 후임자로부터 챙길 것이라도 있을 텐데, 다음 세대는 수요공급의 차이로 권리금 주고 들어와도 받고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정직하게 목회하려면 목회자가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기도와 전도를 강조하고 오직 말씀만 외치던 사람들이 은퇴후 좋은 집, 좋은 차, 넉넉한 생활비를 요구할 정도인데, 기도도 전도고 말씀 준비도 제대로 못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이전세대보다 더 더 정직하고 거룩하게 물러나리라는 법이 없잖은가?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미래? (2015년 7월 17일)

조만간 내가 원하든 아니 원하든 교회를 사임해야 할 시대...

목양하고 싶어도 목양할 성도가 없는 시대...

우리나라의 생산가능인구(15~64세) 비중이 오는 2060년 전 세계 201개국 중 199위를 기록하면서 '꼴찌' 수준으로 추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시골은 인구수가 격감하고 있다. 초등학교의 학생이 없어서 폐교 사태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암담하지만 누구든 이미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한국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5년 이후로부터 교인이 없는 교회가 급속도로 늘 것이다.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목회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그러잖아도 목회할 곳을 찾지 못하는데 상황은 점점 심각해진다. 중년(50~60대) 목회자들은 그래도 제 나이에 은퇴할 수 있지만 젊은 목회자들은 스스로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 좋은 목회 자리를 가기 위해 더 많은 물질이 목회자들과 교회들 안에 이루어질 것이며 현재의 한국교회 상황은 그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물결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노아가 대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준비하였듯이, 5~10년 뒤를 준비한다면 살 방법도 있을 것이다.

첫째. 시골교회가 갑자기 전도되어 부흥되리라는 것을 포기하라. 교세를 늘리는 일보다 현상 유지가 더 급선무이다. 더 나은 임지를 찾지 말고 10년 이상 목회를 계획하라.

둘째. 바울과 같이 목회 외에 다른 일을 익혀 두어라.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기도와 설교와 심방, 오로지 일반적 목회에만 집중하고 있다. 전통적 목회 밖으로 세상일에 뛰어 들어야 한다. 교인이 없어 목회를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상황이 아니라 스스로 수입을 얻어 교회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한 달에 사례비 100만 원 이상의 교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다수의 젊은 목회자들이 미자립교회를 지킨다. 하루 용역 10만 원 열흘만 일해도 100만 원의 최소 생활비가 유지된다. 곧 자비량으로 교회를 지킬 수 있다.

셋째. 전문기술을 익혀라. 교단에서는 이중직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단과 대형교회에서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다. 선교만 바라본다면 굶어 죽을 것이다. 생계와 교회를 지키기 위한 목적의 이중직업은 그 누구도 야단치지 못한다. 만약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의 교회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달라고 요구하라!"

전문기술을 익힌다면 하루 용역 12만 원 이상으로 올라간다. 건축 현장도 노화되고 있다. 대표적 전문직- 타일공, 철근공, 목공일, 조적공... 내 나이 46세(2015년)이지만 건축현장에서 내 아래 사람을 크게 구경해 보지 못했다.

넷째. 찾아오는 교회로 디자인하라. 이제 사람들은 오래되고 낡은 교회를 찾지 않는다. 내가 사는 집이 상의 시설을 갖춘 교회를 원한다. 그만큼 한국의 생활 수준이 고도화되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시골교회는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새로 재건축하지 않아도,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몇 가지 포인트만 새롭게 한다면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 시골교회의 경우 낡고 오래된 휘장만 바꾸어도 분위기가 바뀐다.

다섯째. 남이 도와주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도시의 대형교회들도 고민이 있다. 그 많은 미자립과 시골교회를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겠는가? 차라리 작은 교회 통폐합되기를 원하고 있다.

목회자 본인이 한 달 열심히 일하면 200~300만 원의 재정이 생긴다. 목사가 평신도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돈이 생기면 교회를 위해 쓸 줄 아는 헌신이 있다. 몇몇 분들은 기도만 하라고 한다. -교단의 큰 교회 목사님 이야기다. 목회자를 위한 성회에서 "목회자는 다른 일을 하지 말고 기도하고 말씀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교회 출신 목회자가 개척 중에 어려워 도움을 청하자 "사모님은 무얼 하고 있나? 나가서 돈을 벌어라" 어차피 정치판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공식 석상용 문구와 개인 문구는 따로 있다. 왜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데, 내가 아는 대부분은 은퇴가 돈과 불명예로 얼룩져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주님이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될 수 있도록 달란트를 몰아주신다.

여섯째. 미래사회를 읽고 전략을 세우라.

동성애는 절대 안 된다. 그러나 한국의 동성애가 활개 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세상의 많은 철학과 과학은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아직도 오지 않았다. 성경의 역사대로라면 세상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명은 세 상속에 빠져 뒹구는 일이 아니라, 그 참담한 현실 속에서 생명을 건져내는 사람이다. 얽히고 얽힌 복잡한 사회 속에서 전략을 세우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미래 한국교회의 상황을 고민하라. 지금 이대로 가면 모두 전멸이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자! 그렇게 두 번이나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한국교회의 외침을 보라. 감정과 분위기에 휩싸여 들고 일어섰던 한국교회이지만 그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들었다.

일곱째. 기존의 틀을 파쇄하라. 노아가 산 위에 방주를 짓던 일은 바보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섭리는 바보스러운 노아가 이기도록 하셨다.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 그 도전은 70-80년부터 답습해 오던 목회의 틀을 깨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홍수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도 이전 세대한테서 듣지도 못했다. 전혀 없는 이야기다. 노아의 행동은 당시 최고의 중요 뉴스다. 아브라함도 잘 살던 고향을 일시에 떠난 것도,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전장에 나간 것도,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에게 허락 없이 나간 것도, 기드온이 300명을 데리고 싸우러 나간 것도... 모두가 기존의 틀을 부숴버린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