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하여
일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하여
  • KMC뉴스
  • 승인 2022.07.2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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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네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일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하여

(정대인 박사/갈월교회)

최근 한국교회의 50% 정도가 미자립교회라는 통계가 연이어 나오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인간(목회자)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건강한 목회활동을 위하여 최소 생계가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목회 이외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목회와 또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목회자인가? 노동자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자로서의 목회자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장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일하는 목회자에 대한 인식과 시선의 개선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먼저 몸말에서는 ‘노동자로서의 목회자’라는 표현보다는 질문에서 사용된 ‘일하는 목회자’라는 표현을 채택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해 ‘이중직 목회자에 대한 인식과 실태 조사 및 대응 방향’이란 주제로 개최된 한 포럼에서 발표된 <목회데이터연구소>의 통계 자료를 보면,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월수입은 132만원 정도이고, 50명 미만 교회의 담임 목회자 절반이 이중직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3251. 7월 10일에 검색함). 이 통계는 비록 예장 통합/합동측 목회자를 대상으로 수치화한 것이지만, 감리교단을 포함한 개신교계 전체로 확대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비슷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최저생계비는 2인 가구 월 195만원이고, 4인 가구는 월 300만원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이처럼 일하는 목회자가 처한 상황은 사회 최하층에 해당하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단적 차원의 최저생계비 보장은 어느 교단이나 할 것 없이 법제화되지 못한 채로 계류된 상태이지요. 때문에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목회 활동을 위해 이중직을 선택했다는 소수의 목회자를 제외한다면, 최소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고 목회와 노동을 병행하고 있는 일하는 목회자는 엄밀하게 ‘일할 수밖에 없는 목회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제기된 질문자님의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일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째, 일하는 목회자에 대한 인식과 시선의 개선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제기해주신 물음에 대한 현실적·실천적인 답변은 앞으로 연재될 시리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번 지면을 통해서 저는 목회와 노동의 문제를 이론적·학제적으로 접근하는 글쓰기 방식을 채택해볼까 합니다. 그러면 먼저 일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관점에 확장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역사적 변천과 목회와 노동에 대한 관점의 확장

‘노동’(labor)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17세기 산업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에게 익숙한 노동 개념은 근대와 자본주의의 산물이란 셈입니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의 노동은 대체로 어떤 역사적 변화를 거쳐왔을까요? 근대 이전의 노동 이해는 대체로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고통스러운 것’, ‘창조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 등과 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노동은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이자, 신의 저주로 등장하지요(창 2:5-7; 3:6-8).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은 노동이라는 고된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학문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체적 노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포노스’(ponos)는 ‘형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때 노동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닌 ‘노예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김철식 外, 『모두를 위한 노동 교과서』 (서울: 오월의 봄, 2021), 17).

이런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신의 소명’으로 역전됩니다. 대표적으로 칼뱅(Jean Calvin)은 노동의 결과로 획득되는 부를 축적하는 것은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의 징표이고, 반대로 노동하지 않아 처하게 된 가난은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의 징표라고 보았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생활 규칙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했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동에 대한 중요한 의견을 제출한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신의 주요 저작인 <자본론> 1권에서 노동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면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에서 자신의 행위로 자연을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노동을 규정하였습니다(칼 마르크스/김수행 옮김, 『자본론 1(上)』 (서울: 비봉, 1989), 225-226). 그에게 노동이란 것은 우리 앞에 주어진 자연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변형시키는 ‘구상’(concept)의 행위로 일종의 ‘창조적’ 활동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을 거쳐, 노동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시스템의 리듬에 노동자의 신체적 리듬을 맞추는 포드주의(Fordism)를 통해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적절한 근대적 형태로 확립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고대부터 근대의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노동이란 용어는 부정이든, 긍정이든 일관되게 주로 물질적인 것(material)으로 사용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근대 이전까지는 엄밀하게 ‘노동’과 성직에 해당하는 ‘목회’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노동의 형태는 어떠하지요? 정보화·네트워크 및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 가상공간의 확장, 그리고 자본주의가 극대화되면서 나타나는 글로벌 자본주의 안에서는 물질적인 노동과 더불어 비물질적 형태의 노동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마우리치오 랏자라또(Maurizio Lazzarato)의 말처럼 오늘날에는 몸과 관련되어 물화(物貨)/양화(良貨)되어 나타나는 물질적 노동뿐만 아니라, 물질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비물질적 노동 역시 노동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질 들뢰즈 外/자율평론번역모임 옮김,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울: 갈무리, 2005). 2부를 참조). 즉, 노동에 대한 이해가 고·중세와 근대보다 확장된 것입니다.

이렇게 확장된 노동의 개념을 목회자의 ‘목회’ 활동에 적용하면 목회는 비물질적 노동의 한 형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하는 목회자를 바라볼 때, “목회냐? 노동이냐?”(either/or)와 같은 근대적 이분법에 입각한 물음을 던지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는 시도이기에 지양(止揚)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근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목회자의 목회와 노동이 모두 한 인간 존재의 신체 위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비물질적으로 확장된 노동이라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성직을 수행해야 할 목회자의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이중직이 허용될 때, 그 배후에서 무엇이 은폐되고 있는지를 문제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일하는 목회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시선의 개선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관리사회

여기서 제가 우려하는 것은 오늘날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는 개신교계의 방식이 마치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화폐 아래로 침식되고, 소외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현대 사회를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제게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관리사회’(society of control)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국가, 사회, 종교 등의 시스템)의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리사회는 노동하는 존재들을 과거처럼 ‘착취’하거나, ‘개발’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호’하고, ‘지속 가능하게’ 가꾸어 나가고 ‘살린다’고 말합니다. 즉, 통제하기보다는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리는 결코 ‘자본주의’라는 대전제는 건드리지 않습니다(이정우,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사건, 진리, 장소』 (경기: 인간사랑, 2012), 58). 관리사회는 결코 대전제를 건드리지 않고,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모색하며 삶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들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말처럼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운 시대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고통의 시대였던 산업 자본주의 시대는 다른 측면에서는 역설적으로 노동의 황금시대였습니다. 왜일까요? 노동이 사회적으로 노출되어 문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주의가 확립되면서 노동은 화폐체제 아래로 잠수해버리면서 사회적 시야로부터 사라져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의 문제가 현행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뚫고 사회의 표면에 드러날 때는 대게 정치적 사건으로서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앞의 책, 101).

같은 맥락으로 보면, 오늘날 목회자 스스로 ‘개인적 차원’에서 일하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정하고, 동시에 교단이라는 ‘구조적 차원’에서 이를 허용한다는 것은 마치 관리사회에서 자본주의라는 대전제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일하는 목회자가 목회자의 최소 생계와 목회 및 노동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라고 한다면, 이중직 허용과 지금 불고 있는 텐트 메이커 형태의 목회 확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해결이라기보다는 지연될 뿐이죠.

제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직접 경험한 목회생태계는 뚜렷한 방식으로 관리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한번은 제 주변의 30-40대 같은 또래 미자립교회 목회자 한 분이 사석에서 교단이 이중직을 허용한다는 발표를 접했을 때, 그 말이 이제는 교단이 공식적으로 너희들끼리 알아서 적자생존(適者生存)하라는 뜻으로 읽혀진다며 안타까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서두에 언급한 포럼에서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또 다른 통계를 보면, 목회자 97.7%가 ‘이중직 목회자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동시에 한국교회가 ‘이중직을 인정해야 한다’는 문항에 86.4%가 공감했습니다.

일하는 목회자가 최소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다수의 미자립교회 목회자에게 하나의 분명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안타까운 점은 10명 중 9명이 예측하고, 공감하는 일하는 목회자에 대한 인식의 배후에 결여되어 있는 건, 결국 구조를 바꿔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지점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어쩌면 목회자 이중직이 관리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개신교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은폐하는 하나의 가림막―지젝(Slavoj Žižek)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데올로기적 부산물―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종교는 주류 담론에 대항하는 대항적·전복적 담론으로서의 작동할 때 건강하게 제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한국교회는 문제의 대전제는 건드리지 않고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길을 찾기보다는 고체화된 기존 질서에 구멍을 내고 새 계명의 길을 걸어가도록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미학’(aesthetics of life)을 상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3. 목회자의 노동 문제는 총체성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끝으로 일하는 목회자에 대한 인식과 시선의 개선을 위해서는 목회자의 노동 문제를 총체성(totality)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목회자의 목회와 노동의 문제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목회자 한 사람의 개인 신상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지평과 주위 환경, 더 나아가 소외를 야기하는 교단 및 사회구조, 그리고 궁극적으로 새 창조를 통해 모든 소외를 극복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종말론적 변혁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겠습니다(미로슬라브 볼프/백지윤 옮김, 『일과 성령』 (서울: Ivp, 2019), 259). 비록 그 과정이 지난할 수는 있을지라도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문제의 중핵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일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인식과 시선의 개선을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연기적(緣起的)으로 연결-접속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총체성의 관점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반복되지만 일하는 목회자에 대한 교단적·사회적 차원의 공감과 허용이 임시적 방편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해답처럼 인식되고, 내면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현행하는 ‘배치’(arrangement)/장(場)을 바꾸지 않으면서 새로움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됩니다.”(마 9:17)

지금 이 순간에도 대다수의 일하는 목회자는 소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입장벽이 낮은 노동을 선택해 목회와 병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배달과 관련된 플랫폼 노동, 대리운전, 편의점 주·야간 알바, 물류 상하차 및 분류, 택배 배송 등이 30-40대 미자립교회를 섬기는 일하는 목회자들의 주요 노동 형태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한국교회의 50%에 가까운 목회자들이 이렇게 치열한 노동현장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해 보면, 여전히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은 현행하는 기존 질서에서 안락함을 영위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우리가 일하는 목회자(일할 수밖에 없는 목회자)를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인식과 시선을 위해서는 그들이 나와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총체성의 관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목회와 노동의 길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운을 떼면서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나타난 총체성과 대항적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소환하며 글의 마침표를 찍고자 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행 2:44-47) 성경이 보여주는 총체성과 대항적인 삶을 살아내는 공동체가 ‘지금-여기’ 현실 사회에 도래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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