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대안
선교적 대안
  • 안양준
  • 승인 2022.05.10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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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목회자들이 장례지도사 자격을 갖고 있더라도 일반 상조나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적 문제로 목회자가 제사 집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충돌을 피하기 위해 직접 기독교 상조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이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이중직은 목회를 하기 위한 방편인 까닭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천막 깁는 업을 하지만 이는 결코 주업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개인 상조의 경우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장례 특성상 장례지도사는 항상 주야로 대기하고 있다가 곧장 현장으로 나서야 한다.

현재 기독교의 모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일반인들의 시각에는 대형교회의 모습만 보일 수 있겠지만 미자립 교회가 수없이 많고 그런 까닭에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목회자들이 이중직을 선택하지만 -물론 목회자의 이중직은 사도 바울의 선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앞에서 온전한 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을 위한 성경적 근거에 대해 설명하였고 실제적 적용에서 장례지도사 자격을 갖춘 목회자가 입관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씀드렸다.

일반 장례지도사의 경우 입관할 때 대단한 스킬을 보여주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퍼포먼스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목회자가 주님의 사랑으로 정성껏 씻겨주고 입혀주는 것이 성도들에게 더 큰 감동이 되지 않겠는가? 입관 과정이 기독교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목회자의 경우 이런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장례지도사 자격을 갖춘 목회자가 고인을 깨끗이 씻기고 수의를 입힌 후 입관식에 참석한 유족들이 마지막으로 고인을 보고 손발을 만질 수 있도록 한 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관에 고인을 눕히고 주관하는 교회의 목사님이 마리아가 주님의 장례를 위해 나드 향유를 부어드린 것처럼 나드 향유를 부어드리는 시간을 갖고 이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설명해 준다.

이어 준비된 국화 꽃잎과 장미 꽃잎을 가족들이 덮어드리는데 이때 목사님이 시편 23편을 낭독한 후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가 흰 눈같이 씻겨졌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하고 부활을 상징하는 백합을 그 위에 놓아드린다.

그리고 고인을 위해 마지막으로 다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그때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찬송을 조용하게 틀어준다- 목사님이 마무리 기도를 한 후 입관의 마지막 절차를 진행한다.

입관시 장례지도사는 사수와 부사수 즉 2인 1조로 진행하는데 예식 전체에 소요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며 선교적 차원에서 일반 장례지도사보다 약간 높은 사례를 하면 1달에 네다섯 번(전체 소요시간 10시간 남짓) 정도로도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상조는 장례의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서 친절하게 도와주는 역할이라 하였는데 목회자의 경우 2박 3일 동안 교회를 비울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여전도사가 장례상담사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기존 교회에 사역하는 전도사가 장례상담사로 사역할 때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목회자들이 있어 전임전도사로만 활동케 하려 하였지만 이럴 경우 기존 교회에서 사역하는 전도사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할 방안이 없기에 함께 고민하고 더나은 방안을 찾기 원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과정을 거쳐 장례가 발생할 경우 개교회 전도사가 사역하도록 하는 것도 또다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장례상담사로 사역하는 전도사는 주관하는 교회에 전도가 될 수 있도록 포커스를 맞춰 철저히 교육할 것이다.

이처럼 향유담은옥합상조는 한국교회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목회자와 전도사들이 사역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자 하며 이를 이용할 경우 자연스럽게 선교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기독교 장례의 첫 번째 성경적 근거로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사가 앞장 서서 인도하고 성도들이 이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예배를 주관하는 교회의 목사가 집례할 뿐 아니라 현대 기독교 장례의 사각지대라 여겨지는 입관식의 경우에도 주관하는 교회의 목사가 앞에서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장례의 모든 과정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가운데 영적 지도자인 목사가 앞장 서서 진행할 때 비록 짧은 일정이라 하더라도 전도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예전에 교회가 장례식 전체를 주관할 때에는 장례식을 통해 전도되는 사례가 많았지만 일반 상조나 장례식장에 맡기게 된 후에 현격하게 차이가 난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2-4)

먼저 가신 한 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남아 있는 자들이다. 자신도 동일한 경로를 밟게 될 것이기에 남은 기회를 선용해야겠다는 도전을 안고 돌아오는 이가 지혜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장례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과정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예배를 통해 던져주는 메시지 뿐 아니라 나머지 시간을 장례상담사가 대화를 통해 영적으로 캐어(care)할 때 -약해진 신앙을 회복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인생의 가장 큰 숙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함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는 방법은 부흥회나 프로그램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온전한 기독교 장례 문화가 정착되면 조금의 도움은 되지 않겠는가? 물론 쉬운 일은 아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목회자와 성도, 교회가 함께 하여주길 바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했던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를 종식시킬 도구로 하나님은 예후를 선택하셨고 바알 신앙에 물든 이스라엘의 종교개혁에 착수하도록 하셨다. 개혁은 다르게 표현하면 쿠데타이다. 비록 사악한 아합과 이세벨을 죽이고 종교개혁에 착수하려는 것이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쿠데타로 비칠 수 있다. 이처럼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여호나답이 예후를 찾아왔고 그의 방문은 예후에게 큰 힘이 되었다. 

여호나답을 만난 예후가 한 말이 무엇인가?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르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 10:15)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쓰임받는 자들에게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된다. 온전한 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이라는 작은 외침에 함께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말한 것처럼 서로에 대한 마음의 진실함만 담보된다면 서로 손을 잡고 여호와를 위한 열심을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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