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조(喪助)에 대한 기본 상식
상조(喪助)에 대한 기본 상식
  • 안양준
  • 승인 2022.05.04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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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00년사는 유교 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 유교적 틀 속에서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예식들이 있었는데 이를 흔히 관혼상제(冠婚喪祭)라고 부른다. 이를 풀이하면 관례는 성인식, 혼례는 결혼식, 상례는 장례식, 제례는 제사의식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예식을 대단히 중요시하여 지키던 그때와는 달리 현대는 작은 규범들조차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요즘도 가끔 유교식으로 진행되는 장례예식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지관(地官)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을 보면 “그러면 3년상을 치르든가!”하는 말이 속에서 맴돌곤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요즘식으로 장례를 치른다면 당연히 호로자식이란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처럼 급변하는 시대 조류 앞에서 과거의 모든 전통들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뿐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 과거의 모든 전통들을 없앤 바 있다. 단 하나 복음(福音), 그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모든 것들은 무시할 수 있다고 선포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

이는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 절기들이나 월삭, 안식일 등을 지키는 문제들, 그 위에 조상의 유전까지 지켜야 하는 일들은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즉 십자가 사건으로 이 모든 것들을 뒤엎으신 것이다.(골 2:1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예배는 장소도 중요치 않고 오직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앞에 제시했던 성경적 근거들도 주님 앞에 신령과 진정(영과 진리: 요 4:23)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의 중심일 뿐 이를 고집할 경우 기드온의 에봇(삿 8:27)이나 모세가 만든 놋뱀(왕하 18:4)처럼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기독교 장례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갔는가에 있다. 이를 전제로 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장례예식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장례예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상조(喪助)는 예전에 장의사로 일하던 분들이 시대 변화에 따라 직업의 형태를 바꾼 것이다. 상조는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힘든 시간에 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닥치는 것이다. 이는 평소에 준비를 잘해 두었다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장례식장은 누구에게나 낯선 장소이다. 더구나 장례 기간도 너무 짧아져 자신의 슬픔을 감당하기도 벅찬 상황에 조문객을 맞이하고 각종 행정처리까지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친절하게 옆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상조이다.

물론 장례식장에 모든 것을 맡길 경우에도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그럴 경우 일일이 모든 것을 찾아가서 물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장례식장의 구조상 옆에서 친절하게 도와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상조는 서비스(service) 업(業)에 속하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장례를 치를 목적에 상조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비스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에 있다. 물론 서비스업이기에 상조를 선택한 경우 대부분 만족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마틴 부버가 말한 것처럼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아닌 물질과 물질의 만남이 될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목회자의 시각으로 볼 때는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분에 가득 차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상을 엎으시고 내쫓으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물론 장례식장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식이 되어야 할 기독교 장례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볼 때 아쉬운 심정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그런 모습들이 일반인들의 시각에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은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자들이 입관예식을 진행한다는 점이다. 장례 모든 절차는 반드시 장례식장에서 치러야 한다는 것, 장례지도사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입관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현대사회에서 법제화되어 있는 두 가지 룰 때문에 입관실은 기독교 장례의 사각지대가 되어버렸다.

이미 불교와 유교는 혼합되어 입관식에 사용되는 멘트는 교육 과정에서 반드시 외워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아직껏 기독교용 멘트는 만들어진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장례 모든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진행되는 예식이기에 아무나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그럴 수도 있다.

기독교 상조라는 이름을 갖추었지만 기독교 장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장례도 취급하는 것도 사업상 불가분한 이유이고 소속된 장례지도사들이 일반 장례의 경우 제사를 집례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지도사 자격을 갖춘 목회자들이 기독교 장례를 진행해야 하는데 일반 상조나 기독교 상조에 들어가서 일하기에는 현실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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