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마흔 다섯 번째 이야기
큰나무 마흔 다섯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2.03.24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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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에 산수유나무에 노란 꽃망울이 맺혔다. 코로나와 전쟁으로 여전히 세찬 겨울 속을 걷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과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선 듯 봄을 알리는 전령의 소식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계절은 오차 없이 우리 곁에 오지만 음추린 몸을 펴지 못하고 다가선 계절을 어찌해야할지 모른다.

사람에겐 몸의 감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각도 있는 듯하다. 저 무의식 어딘가에 우리의 뇌에 느낌을 전하는 보이지 않는 감각 기관이 주변을 마음의 생태에 따라 다른 해석과 모양으로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슬픈 이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슬픔으로 다가서고 외로운 이에게는 외로운 그것들 이다. 가녀리게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꽃은 슬픈 이의 눈에는 한없이 슬퍼 보이고 냇가에 홀로선 버드나무는 외로운 이에게는 외롭게 보일뿐이다. 보이는 대상과는 상관없이 느껴지는 이 마음의 감각에 이끌려 사는 것은 굴곡 된 많은 상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오늘 두려워하거나 분노하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에 의해 허상이 아닌지 생각한다. 이 환영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란 창살로 영혼을 가두고 속박의 상황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사람들이 격고 있는 현실은 두렵거나 슬프거나 하는 감정이 개입된 상태로 주어지는 경우는 없다. 이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이입 되면서 상황은 슬프게도 변하고 두렵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무엇을 잃게 되거나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은 그것들이 실상으로 일어나더라도 우리 삶을 별다르게 만들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수년전 야생화에 마음을 저당 잡혀 산천을 헤매며 온갖 들풀을 집안으로 드린 적이 있었다. 구들장을 만드는 얇은 돌판 위에 마치 자연을 축소하여 옮겨 놓은 듯한 연출로 시작해서 다양한 화분을 시들이고 심지어는 옛날 기왓장 까지 수집해서 야생화를 심어 집은 발들일 틈도 없이 야생화 꽃밭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야생화는 나의 삶에 족쇄가 되었다. 어름이면 하루에 두 번 이상 물을 주어야하기에 먼 곳으로의 외출을 힘들게 만들었고 벌레를 잡고 햇빛을 조절하느라 매달리는 시간을 길게 만들었다. 어느 날 이 노예의 삶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사건으로 끝나버렸다. 아내와 시내로 외출을 하고 돌아 왔는데 마당은 허전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많은 야생화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도둑을 맞은 것이다. 무려 칠년을 넘게 모으고 가꾼 것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루가가고 이틀이 가면서 그 많은 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었는지 생각했다. 나는 비로소 삶에 아주 긴 시간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절부절 못하는 노예의 삶을 훔친 도둑에게 가해질 처절한 아픔을 생각하면서 달콤한 믹스커피를 즐겼다.

환영은 우리를 위험한 전쟁에 나가는 군인처럼 무겁게 무장시키며 긴장으로 두르고 편안한 의자를 빼어버린다. 가끔 누워 음악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뇌를 진공에 가까운 상태로 내버려둔다고 세상이 끝장나는 일이 버러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을 지우고 뇌를 단순화 시켜 놓쳐버린 자연의 소리를 듣고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닐까

너무 오랜 시간을 별일 아닌 것에 놀라고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면서 귀한 시간을 소비하며 산 것 같아 주님께 송구하고 자신 앞에 미안하다.

오늘 하루는 뒤뜰에 놓인 낡은 의자에 기대서 아무일도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마져 힘들게 느껴지면 방에 누워 천정 무늬를 세는 일로 하루를 보낼 것이다. 밤이 되면 마당으로 나가서 오랫동안 하늘의 벌도 바라볼 것이다. 환영의 무장을 벗은 밤이 편안하다.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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