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기억하리라
그를 기억하리라
  • 안양준
  • 승인 2022.03.23 08: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향유담은옥합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이외의 모든 것들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이로써 세상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맺은 선악과 언약을 파기하여 그에 따른 결과 즉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내용대로 인간에게는 죽음이 찾아왔고, 아담의 원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성경은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에 대해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경의 핵심 포인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열쇠이다. 성경은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제시하신 큰 그림이 바로 천국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4-45)

주님의 말씀대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천국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저버리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결코 천국을 상속받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2년 개봉했던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가 있다. 배경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편 외에 거대한 저택에 여주인공과 두 아이가 살고 있다. 빛에 노출되면 극심한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 때문에 대낮에도 커튼을 치고 안전을 위해 늘 문을 잠가두었다. 이 영화는 잔인한 내용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끝날 때까지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결말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다. 지면상 영화 줄거리를 자세하게 쓸 수 없지만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죽은 존재였다는 사실…. 집 안에 귀신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귀신이었다는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내용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잔상(殘像)이 남았던 기억이 있다.

마치 영화에서 본 듯한 시나리오가 우리에게도 현실로 다가온다면? 나는 믿음이 있다고, 그래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마지막 종착역이 천국이 아니라면?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 13:40)
자신이 알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 불에 사라지는 가라지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전 글에 기독교 장례의 ‘왜?’에 대한 문제에 대해 간단히 답을 제시하였다. 즉 수없이 많은 기독교 장례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온전한 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을 위해 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온전한 기독교 장례의 경우 성경이 말하는 알곡에 해당하며 가라지에 해당 사항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리플렛에 “온전한 기독교 장례를 원치 않을 경우 타상조를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정중한 사양의 표시도 적어놓았다. 현대에 와서 장례식장은 고려시대처럼 불교식 장례이거나 조선시대처럼 유교식 장례가 아닌 수많은 종교와 이단과 사이비까지 총망라한 집합소가 되어 있다. 그 안에 수많은 상조가 생겨나고 기독교 상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수없이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조금도 간섭할 생각이 없다. 하나님의 시선이 외모가 아니라 중심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온전한 기독교 장례는 순전한 신앙을 갖고 신실하게 살다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포커스(focus)를 두고 있다. 

필립 얀시가 쓴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라는 책에 “성인(聖人)들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그 공기를 호흡하길 거부하고 순순히 그 거짓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이는 세계에 살면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규칙을 따라 살고자 한다.”라는 글이 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한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승리한 기독교인들의 장례 예식의 경우 이에 합당한 온전한 기독교 장례로 행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 장례를 통해 많은 이들의 천국행을 바라보며, 그 과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때 나의 마지막도 천국행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기에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어떤 분들이 “성도가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장례는 남아있는 자들을 위한 예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구원을 얻었음에도 세례 예식을 치를 것을 명령하셨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속 사역이 완성되었음에도 성찬 예식을 통해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임종하신 성도의 경우 이미 낙원에 이르렀음을 조금도 의심치 않지만 그럼에도 성도의 장례 예식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성도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급하게 건너버리는 것 같은 모습은 결코 아니어야 할 것이다. 물론 특별한 경우 -초대기독교 당시 화형을 당하거나 사자의 먹이가 되거나 하는 경우- 는 있을 수 있고 이와 같은 순교는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이 주어질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온전한 예배로서 진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왜?’가 아닌 ‘어떻게?’에 대한 부분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깨달은 말씀을 토대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