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독교 장례 문화 되찾기!!
잃어버린 기독교 장례 문화 되찾기!!
  • 안양준
  • 승인 2022.03.15 0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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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기억하리라!!
향유담은옥합(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을 위하여)

리더스다이제스트 명언집에 “어떻게 하는지 아는 사람은 쉽게 일자리를 얻지만, 왜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부리는 자가 된다.”는 글이 있다. 이 글은 단순히 비즈니스 부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소중한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노하우(knowhow)는 갖고 있지만 ‘왜 일을 하는지?’ 또는 ‘왜 살아가는지?’ 즉 본질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는 까닭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에 등장하는 첫 번째 소설이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이다. 소설은 주인공 뤽이 아침에 일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자명종과 주방기구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넨다. 전자공학의 발달로 모든 가전제품이 인공지능이 된 까닭에 안락한 삶으로 변화되었지만 예전의 아날로그 시대가 그리워질 무렵 자신조차 인공심장을 단 사이보그 같은 존재였음을 알게 되는 반전으로 소설은 결말을 맺는다.

인문학의 발달로 인간은 우연히 발생한 존재라는 진화론, 신은 존재치 않는다는 유물론, 인간의 정신적 문제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심리학 등이 현대인의 사상을 지배하는 현실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도인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주셨고, 구원해주셨고, 사명을 맡기셨다고 믿는다. 신앙은 1:1 관계이기 때문에 삼자가 판단할 영역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신앙적 자세를 갖고 살아간다.

작년 10월 「그를 기억하리라」(나침반 출판사)는 책을 출판하며 기독교 장례문화 정착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유는 ‘어떻게?’의 영역이 아닌 ‘왜’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들을 통해 내용들을 소개하는 과정을 갖겠지만 첫 시간에 장례문화의 변천을 통해 ‘왜?’에 관한 간단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고려의 불교식 장례, 조선의 유교식 장례 등 장례는 한 국가의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의 흥망 이외에는 장례문화는 변함없이 이어져 왔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짧은 기간 급변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변화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다. 1912년 공포한 「취체규칙」은 ‘화장과 공동묘지’가 이슈가 되었고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의례준칙」은 간소화라는 이름으로 전통적 장례 풍습의 절차 대부분을 생략하는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1960년대 말 성행한 장의사는 전국에 6,000여 곳에 이를 정도였지만 산업화(도시화, 핵가족화) 과정에서 전문 장례식장이 생겨남과 동시에 발판을 잃은 장의사들이 상조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후 장법의 변화는 봉안당에서 수목장·자연장·해양장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아직도 성도가 임종하였을 때 직접 염을 하고 교회가 맡아서 장례 준비를 하며 교인들이 상여를 메고 나가던 기억들이 눈에 선하게 남아 있는 분들도 계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에는 그래도 기독교장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급변하는 장례문화와 더불어 기독교장례의 자리도 점차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일반 가정에서 장례를 치를 수 없게 법이 바뀌었다. 장례식장 시설을 이용하지 않고는 염습을 진행할 수도 없고, 장례지도사 자격을 갖추지 않고는 입관실에 들어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장례가 발생하면 상조나 장례식장에 맡기는 것이 당연시 되었고 교회는 예배를 인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바쁜 일상으로 인해 예전처럼 성도들이 자리를 지켜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장례의 현주소다. 현대 장례식장은 온갖 종교의 집합소요, 그곳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장례예식을 볼 수 있다. 물론 기독교장례는 목회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철칙처럼 되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베르베르의 소설처럼 자본주의가 일상의 편리함은 가져다주었을지 몰라도 예전의 방식을 그리워 할 즈음 자신 역시 인공 심장을 달고 살아가는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존재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물질이다. 서비스는 재물을 취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기독교상조 역시 서비스업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관심은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데 있을 뿐이다.

이제 앞에서 제시한 본질의 문제로 들어가고자 한다.

‘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한 역대기에 수많은 왕들의 불신앙적 행태를 볼 수 있지만 간혹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롭게 여길만한 왕들의 특징은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잘못된 신앙을 버리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장례를 현 상태로 방임하여도 하등 문제가 없을 경우 개입할 마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기독교장례는 온갖 불순물이 침투하고 순전한 신앙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성경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위선과 외식은 결코 숨길 수 없다. 물론 타인의 신앙이나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일 경우 각 개인 신앙의 순전함을 지켜내는 일 뿐 아니라 교회 전체 신앙의 순전함을 지켜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왜?’에 대한 해답이요, ‘어떻게?’에 대한 부분은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이들이 동참해 주기를 소망하며 그리 아니할지라도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갈 것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안양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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