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2] 노년을 위한 목회사회학
[특별기획 2] 노년을 위한 목회사회학
  • KMC뉴스
  • 승인 2022.02.2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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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코로나 교회 리빌딩을 위한 제언

잃어버리고 잊히는 세대를 위하여

전병식(배화여자대학교 교목실장)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18)

환갑을 맞으면 인생을 한 바퀴 돌았으니 다 살았다는 뜻에서 반귀신이라 칭하던 때는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우리 사회에서 노년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지하철 무임승차가 시작되는 나이가 노인일까? 노인이라 불려도 거부감이 없는 나이는 몇 살 부터일까? 생물학적이나 물리적으로 볼 때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를 생각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직장이나 일에서 은퇴하는 시기인 60대 초중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노년부는 몇 살을 기준으로 나눠야 하는 것인가? 개인적인 의견으로, 목회사회학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무엇인가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잊혀져가는 상실이 시작되는 시기가 노년이지 싶다.

우선,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상실이 시작된다. 은퇴를 함으로써 경제적인 상실이 오게 되는데 그와 맞물려 건강에 문제가 오기 시작한다. 작년 말에 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급성담낭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쓸개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대학 동기 중 여러 명도 ‘쓸개 빠진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동년배의 몇 명에게도 쓸개가 없노라는 자백(?)을 들었다. 물론 쓸개염이나 담석증이 나이 먹어 오는 병은 아니지만 나이 먹어 드는 병이기도 하다. 쓸개는 조금 특별한 경우이고 나이 먹어 가면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하고, 치아를 잃어서 임플란트의 개수로 형 아우를 따지기도 한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 수술로 개안을 하기도 한다, 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이 덤으로 오면 걷기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힘이 빠지는 시기, 젊은이만큼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어 상실감을 느끼는 때가 바로 노년이다.

정신적인 노화, 심리적인 상실은 상처가 더욱 크다. 무언가를 읽어도 남지 않고, 들어도 새겨지지 않으며, 보아도 느끼지 못하는 시기가 오면 그만큼 편견과 고집이 늘어나게 된다. 이해하기보다는 오해가, 수용하기 보다는 거부하는 일이 늘어나서 노(no)하는 노(老)가 되어 노(怒)를 분출하기 일쑤이다 - 노노노! 한국의 못나고 못된 정치가들의 정치 행태가 뿌려놓은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와 진보와 보수의 이항 대립은 특히 노년세대가 이짐을 부리고 이퉁을 세우는 것으로 노노(老老) 갈등과 노청(老靑) 갈등을 부추겨서 심리적인 불안을 키우고 있다. 꼭 정신 질병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치매라든가 노인성 정신병을 동반하는 노년섬망(老年譫妄) 등 또한 노년에게 다가오는 심각한 정신적 타격이다.

사회적인, 관계의 상실은 노년세대의 삶을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들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사회적 죽음으로 내몬다. 그게 타살이 되었든 자살이 되었든. 왕년(往年)은 왕년일 뿐이다. 과거의 명예, 사회적 위치, 관계의 영향력 등에서 밀려나게 되면 그걸 알아주지 않는 젊은 세대에게 섭섭증이 커지지만, 그러나 속만 상할 뿐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결국 섭섭한 또래를 만나 회포(懷抱)를 푸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일인데, 그 친구마저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다시 사회적 관계의 상실은 잠자리에서 옆으로 누워 어리는 눈물이 되고 만다.

기독교, 교회에서 노년세대의 상실은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로 나타난다. 교회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직임과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면 그 물러남을 신앙적인 상실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가장 위험한 반응이다. 물론 노년의 시기에도 나이별로 선교회라든가 봉사회 등의 여러 모임이 있어 참여할 기회가 많이 있다. 노인대학을 열어 노년세대에게 적절한 교육과 여가 생활 등을 제공하는 교회도 많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중임과 중책을 맡았던 교인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스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밀려난 둣한 감정에서 분노를 보이는 경우도 있고, 직책에서는 물러났지만 원로로서 간여할 수 있는 역할과 간섭에 민감하여 좌충우돌하는 경우도 생기며, 신앙의 경지에서 만큼은 ‘내가 아직은 상당하다’라는 자부심에 신앙심의 돈독과 독실(篤實)을 무기로 ‘기도해주기’ ‘신앙 상담’ 등으로 자기를 드러 내고자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기가 잃어버린 상실(감)을 교회에서 보상받으려는 태도이다. 이때는 답(答)도 문(門)도 없다.

이와 같은 잃어버림과 잊힘을 상실이 아니라 현실로 인정하고, 스스로의 노년세대를 진정 복된 “센 머리”의 주인공이 되어 공경을 받으며(레위기 19:32) 사는 날까지 힘껏 “주의 능력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주의 권능을 장차 올 세대에” 전하는 신앙과 인생의 주인공으로 세워주는 일이 목회자와 교회가 할 일이라 여긴다: “이제 내가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알리고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겠습니다.”(<메시지성경> 시편 71:18)

이 일을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일을 목회자와 교회가 해 주기를 바라며, 이 제안이 노년을 위한 목회사회학의 논의와 실행의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노년의 자신을 바로 보고 바로 알아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는 ‘자기 인정’의 태도와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는 자세를 갖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디다케)

둘째, 어떤 방식으로든 교회에서 노년 세대에게 필요한 도움, 돌봄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해서 실제적이고 적절한 삶의 태도를 갖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케리그마)

마지막으로, 노년세대에게 예배와 봉사, 교육, 선교 등에 알맞은 역할을 주어 그 일을 해내도록 도움과 안내를 함으로써 젊은 세대를 위한 인생의 안내자요 지혜자로서 노년을 더욱 힘차고 보람 있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레이투르기아,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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