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마흔 세 번째 이야기
큰나무 마흔 세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2.02.1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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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기대하는 것은 다분히 모험이다. 사람은 육체의 한계와 의지의 한계가 분명한 존재이다. 기대의 옆에는 그림자처럼 실망의 그늘이 함께한다. 세상에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키며 사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다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기대를 받고 사는 사람의 걸움을 무겁게 하고 기대하는 이들을 초조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세상을 사는 것도 싱거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도리어 그 기대의 폭을 줄이거나 사람이라는 연약의 구석을 인정한 기대를 원하고 싶다. 페르시아의 양탄자라는 말이 있다. 페르시아 여인들은 아름다운 양탄자를 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양탄자가 완성 되면 일부러 흠집을 내면 완벽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한다. 인간은 온전함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서로가 보듬는데 존재의 가치가 높다.

센터에 자원봉사자로 오는 분들 중에는 상당한 재능을 지닌 분들이 많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면서 아이들이 상당한 영향을 받고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변화가 더디고 의욕이 많지 않은데 실망을 하거나 의문을 제기한다. 의욕을 갖고 시작한 봉사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이내 봉사를 포기하기 십상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봉사자 교육에서 누누이 강조하기를 기대의 폭을 최소화하라고 요청한다. 아이가 눈에 띠게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오늘의 봉사가 아이가 성장하는데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중학교 아이에게 공간개념과 원근법을 이해시키는데 일 년이 넘게 걸린 경우도 있다. 이해를 못하는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전달자가 좀 더 다양한 접근방식과 전달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슈퍼맨으로 만드시지 않고 연약한 육체를 지닌 존재를 만드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인간의 연약은 수많은 갈등과 불평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한계로 여겨지던 일들의 놀라운 의지나 훈련으로 극복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는 이유도 연약을 기반한데서 연유한다.

나는 가끔 아이들 부모에게서 우리 아이가 영재가 아닌지를 보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아이들의 독특한 그림이나 언어, 글쓰기 등이 또래 아이들 보다 좀 났다는 것이다. 대부분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낳은 착각이다. 내 자신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영웅으로 등극하는 상상을 하지만 그러한 아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할 것이 있다면 그 성장 시기에 걸 맡는 행동과 사고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에 지나는 것은 어른의 욕심이다.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초월적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현실적 답답함을 이해하지만 그 경계를 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은 그 이성의 범주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현실의 한계를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사고의 범의를 허락 받은 존재이다. 단지 욕심이 앞을 가린 인간들이 용서와 나눔을 이루지 못한 죄의 결과로 고통당할 뿐이다.

예수님의 위대함을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데 있지 않고 인간의 한계 안에서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삶의 표준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선거철이다. 초월적 지도자를 기대하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대단한 변화를 가져 올 거라는 기대는 필경 얼마 지나지 않아 비난을 가져오거나 실망하게 될 것이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지도자가 아니라 구성원들이다. 단지 기대가 있다면 선택 된 후보의 눈이 낮은데 있어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정책을 펼쳐가는 것이다.

겨울바람이 골자기를 흔들며 지나는 깊은 밤에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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