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과 현재의 상황비교
루터의 종교개혁과 현재의 상황비교
  • 최광순
  • 승인 2022.01.01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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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첫째, 교황청의 면죄부 발급입니다. 돈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너도, 나도 면죄부를 사려 합니다. 현 한국교회는 면죄부는 아니지만,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함으로 헌금액을 믿음과 연관시킵니다. 즉 믿음은 구원과 연관되는 것으로 면죄부와 성격이 비슷한 점을 보입니다.

둘째, 루터 당시 95개조 반박문은 과학의 발달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전 유럽으로 대량의 문서가 퍼질 수 있었습니다. 일일이 펜으로 옮겼다면 루터의 활약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지금 시대는 당시 인쇄술의 발달과 같은 SNS를 통한 엄청난 파급력입니다. 사제들에게만 한정된 정보가 일반백성들에게 빠르게 파급되었듯이 지금은 평신도들에게까지 감추어진 정보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셋째, 당시 르네상스 문화 영향으로 교황들은 아름다운 성전과 궁전을 짓습니다. 더 아름답게 더 크게, 교황들은 예술적 가치로 무장한 건축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자랑합니다. 현시대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더 크게 더 아름답게 성전건축에 몰입합니다. 교회 성장과 웅장한 교회 건축은 한국교회에 안에서 목사의 위상을 자랑하며 수많은 곳에서 집회의 초청을 받습니다.

넷째,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항의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교황청에 반발하여 루터를 지지하는 이들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비판하며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500년 전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일들.

루터는 신학대학의 교수로서 당시 사회적 명성과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입니다. 교수라면 교수라는 밥줄에 연연하지 않고 교수직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 목사라면 자신의 교단과 한국교회 안에서 퇴출 받을 용기로 외칠 수 있어야만 개혁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종교개혁을 맞이하며 수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이를 기념하는 설교가 이루어지지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500년 전 교황청에서 개혁을 외친다면 그것을 사람을 현혹하기 위한 입바른 소리였을 뿐이다. 무지한 교인을 달래기 위한, 가진 자들의 사탕발림 같은 소리... ‘아멘’ ‘아멘’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교회가 종교개혁으로 이루어졌기에, 당연히 교회가 종교개혁에 의한 주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과 기득권에 묶여 안주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교회는 여전히 과거의 것만 고집하는 중세시대의 교황청과 닮은 모습을 보입니다. 사제들이 교황청의 울타리 안에서 숨어 있었듯이, 많은 목사가 교단이라는 울타리 안에 숨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할지를 몰라 고여 썩어가는 물이 되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비판하는 자)이지만 목사의 테두리 안에서 중세시대의 프로테스탄트와 같이 생명을 내걸고 싸움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의 목사가 목사라는 직분을 하나둘씩 내려놓는다면 진정한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을까? 루터가 사제를 내려놓음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시작되었듯이 목사가 목사를 내려놓을 때 진정한 목회라는 말이 실현되지 않을까?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조용히 침묵하며 그녀와 관계를 끊고자 했을 때 주위 사자가 “그에게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합니다. 무서워 말라는 요셉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전통적 가치관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수많은 질문입니다.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에 발을 담그던 그 사람들! “강물이 멈추면 가겠습니다.”라고 계산적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생명을 내놓고 발을 담그던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믿음을 말하지만 언제나 ‘기도해보겠습니다’ 하며 명령을 당연시 뒤로 연기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현실적 계산을 따져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더 큰 교회, 더 많은 사례비, 더 많은 교인이 주어지면 기도도 해보지 않으면서 가겠다고 하면서, 더 작은 교회, 더 적은 사례비, 더 적은 교인은 기도해보겠다 말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는데, 목사는 갈 바를 알고 떠나려 합니다.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만들며 그 일을 준행하였건만, 목사는 방주 만들 돈도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향해 나가지만, 목사는 참호 속에 숨어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하며 누군가 나가기를 기다리기만 합니다.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예수님은 과거의 잘못이 있을지라도 귀있는 자는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즉 과거가 어떻든 지금 주님의 말을 듣고 돌이켜 주님의 원하는 길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선택이 틀린다면 들고 있는 별들을 옮기며 촛대도 옮기시리라는 것입니다. 목사도 교회도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목사와 교회를 찾기까지 주님은 계속 다니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 교회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까? 중세의 구교를 벗어나 개신교를 세웠듯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환경과 사람을 찾지 않을까?

이 땅의 교회가 언제까지 영원할 것인가? 이 땅의 목사들이 언제까지 영원할 것인가?

면죄부나 팔며,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 건축에 하나님의 은혜 운운하며 자기 업적 자랑하는 이 시대의 목사가 중세시대의 가톨릭과 너무 닮아도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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