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마흔 번째 이야기
큰나무 마흔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1.12.3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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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라기눈이 내린 아침은 떡 쌀을 물에 불려 씻어 놓은 소쿠리처럼 정겹다. 지난 밤 출장에서 늦게 돌아 올 때만 해도 매서운 바람이 계절의 심술을 부렸는데 새벽녘에 날이 풀리면서 눈을 만들어 낸 모양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시골에서 방앗간을 운영하셨다. 연말이나 설날이 다가오면 절편이나 찰떡을 빼기 위해 마을 아낙들은 방앗간 밖까지 저마다 물에 불린 흰 쌀 바구니를 들고 줄을 섰다. 간식이 궁한 시골 개구쟁이들은 방앗간을 드나들며 긴 떡가래 하나씩을 얻어 들고 텃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화로에 재를 휘저으면 빨간 숯불이 얼굴을 내밀고 떡은 누렇게 익어 갔다. 눈 속에 뭍인 마을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고만고만한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깊은 정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

어릴 적 기억은 싸라기눈처럼 작은 알갱이가 되어 부서지고 읍내까지 차를 몰고가야하는 걱정이 앞을 가로막는다. 길은 유리알처럼 반작거리며 자신이 얼마나 미끄러운지를 경고하는 듯하고 아침마다 마주치는 인상들도 차를 두고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눈만 오면 아찔해지는 비탈길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하고 읍내로 들어서는 대로에 나오면서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발달한 행정력은 제설작업을 서둘러 뿌려놓은 염화칼슘이 싸라기눈 보다 많아 보였다.

읍내 가게는 선거 이야기와 코로나 이야기로 들썩거렸다. 지지하는 후보에 따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이 이어지고 있었고 마을 체육시설에서 번졌다는 코로나는 어디로 퍼져나갔는지 행방을 찾느라 야단이었다. 선거나 코로나는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이미 여러 번 겪어 차분해질 만도한데 나아지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한 사람의 정치가가 천하에 몹쓸 인간이 되어 있었고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도 어느 한편에 서야 직성이 풀릴 지경이다. 이 극단의 상황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사람의 판단이 온전했다면 지금의 상황은 일어나지 말아야 옳다.

시골 마을도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정겨움을 느낄만한 구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바위처럼 굳어진 사고에 매몰 된 사람들이 많아져가고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연습이 되어 지지 않은 사람들은 언쟁에 지쳐가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시작 된 선동적인 작업은 나름 효과를 얻어 서로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질고에 걸린 사람들을 위로하는 정서는 사라지고 질고보다도 더 아픈 사회적 몰매를 맞아야하는 현실이 더 두려운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사회든 종교든 첨예한 극단에 처할 때는 시험의 시간임을 직감할 필요가 있다. 사탄이 예수님을 첨탑 위에 세울 때 하나님의 아들도 시험의 순간이었듯이 모든 극단은 이성의 끈을 놓지 말아야할 시험의 시간이다.

종교를 정치적 선동의 극단과 연결시켜 하나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사고이다. 종교적 결단은 자신의 판단과 사고를 극단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신을 부인하고 관용과 용서의 장에 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온전해지려는 미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비 앞에 죄 된 인간 본성을 발견하는 복 된 의식의 시간 이기도하다. 인간의 나약이나 부족함은 신의 불안정성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도리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가 위로자가 되고 협력자가 되도록 요청 받은 존재이다. 비난과 책임전가가 난무하고 갈라져 귀 닫은 사회는 서로가 낯설다.

닫힌 사회를 열어갈 책임은 종교에게 주어진 책임일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눈 어두운자의 눈을 뜨게 하고 귀 어두운자의 귀를 열어주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를 해방시키도록 요청하신다. 이들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릴 때 하늘에서도 풀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이웃과의 단절 된 상황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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