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조지 오글 선교사 1주기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조지 오글 선교사 1주기
  • 송양현
  • 승인 2021.12.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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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감리회본부 교회에서는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명 오명걸)목사 추모 1주기(2021. 11.15) 추모식을 가졌다.

추모식은 1부 추모예배, 2부 추모 및 헌정의 순서로 진행됐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에큐메니컬위원회가 주관한 추모식에 이철 감독회장을 비롯해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미연합감리회세계선교국(GBGM),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사)기독교민주화운동, 한기독교교회협의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9평화통일재단, NCCK인권센터, 이정숙 여사(인혁당 희생자 이수병 선생의 아내), 최영희 의원, 신앙과지성사,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전남병 목사(에큐메니컬위원회 서기)의 사회로 드려진 추모예배는 오일영 총무(감리회본부 선교국)의 기도, 이철 감독회장의 설교, 추모영상, 유홍근 목사(선교국 사회농어촌환경부장)의 인사, 신경하 감독(전 감독회장)가 축도를 맡았다.

이철 감독회장은 ‘한 알의 밀알’이라는 제목으로 “조지 오글 목사님은 위기 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하여 부딪혔던 분이고 목사님이 헌신하고 희생했던 대상은 갚을 길 없는 약자들이었다. 그것이 참 신앙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믿어 그렇게 사신 것”이라며 “그렇게 복음을 삶으로 사셨던 분을 오늘 우리가 추모하고 기억하는 일은 당연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설교했다.

하종강 교수(성공회대)는 영상을 통해 조지 오글 목사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숭의교회에 소속하셨던 오글 목사님을 중학생 때 뵈었는데 한국말을 참 잘했고 착하고 진지하게 느껴지도록 말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으며, “우리 집 근처에 사셨는데 거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다. 평민이 사는 보통집 중에서도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숙소를 마련하여 사셨던 것이다. 산업선교회는 선교대상과 같은 수준에서 생활하고 활동한다는 원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조화순 목사도 영상을 통해 “조지 오글 목사가 내 인생을 바꿨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목사안수를 받은 34살 때 오글 목사님이 사람 만들겠다며 자신을 공장에 들어가게 했다고 밝혔다. 또한 “몸으로 노동을 체험케 하는 것이 목사님의 철학이었다. 그래서 내가 위장취업 1호가 됐다”고 했다. 조목사는 “그 때부터 가난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노동운동을 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2부 추모 및 헌정의 시간에는 조진호 목사의 특별찬양(반주 배진교 선교사), 안재웅 목사(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 이홍정 총무(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최영희 전 의원(인천도시산업선교회 전 실무자), 이창훈 사료실장(4·9통일평화재단), 정진우 목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 부이사장) 등이 추모사를 전했으며, 조지 오글을 추모하는 책 ‘한국 민주주의의 친구 조지 오글(신앙과지성사)’ 헌정식을 가졌다.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인 안재웅 목사는 “조지 오글 목사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인데 한국을 찾았던 것을 보면 이분은 한국이 산업화 될 것이고 노동운동이 필요하다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리고 인혁당 사건을 증언하기 쉽지 않았을 시기인데 그 일로 추방당한 후 에모리에 가서 교수 생활을 했는데 실천신학적 측면에서 일목요연하게 글을 쓰고 강의를 했다. 또 초지일관 목사로서 UMC에서 사회선교에서 열심히 일했다.”면서 “우리도 조지오글 목사의 뒤를 따라서 성실히 우리 의무를 다했으면 한다.”고 추모사를 남겼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이홍정 총무는 “조지 오글 목사님은 냉전과 분단의 족쇄를 찬 채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로 신음하며 고통받는 한반도에서 사회적 약자를 환대하며 그들과 동행하는 새 계명의 길을 걸으셨다. 이승만 친미독재, 박정희 반공군사독재정권이 추구하는 정치권력체제의 수립과 국가주도형 경제성장의 목표아래 다른 모든 가치들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시절에 소외와 억압의 높은 파고를 견디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민중들의 생명의 발아를 위해 온 몸을 던지셨던 분이고 고난의 행군을 하던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들의 권리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셨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최영희 민주당 전 의원(인천도시산업선교회 전 실무자)은 “공장에 가서 예수를 찾아와라, 빈민촌에 가서 예수를 찾아 와라고 하셨지만 아무리 찾아도 내 눈에는 예수가 안보였다. 하지만 그분의 행동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게는 오명걸 목사님이 예수인 것 같았다.”고 그를 회상했다.

4·9통일평화재단의 이창훈 사료실장은 “인혁당을 숨겨주면 가족까지 잡혀가던 시설에 조지 오글 목사님 추방당하면서까지 인혁당 동지, 민청학련 동지들을 구하려 했던 한국의 선한 사마리아인이셨다.”고 회상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 부이사장인 정진우 목사는 생전의 조지 오글 목사님을 가장 최근 만난 한국인일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파킨슨 병으로 힘들어 하시면서도 한국말로 한국의 통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셨고 한반도 평화정제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시기도 했다.”며 임종 전까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살아 있었음을 전했다.

이날 추모식에서는 조지 오글 목사를 추모하며 엮은 책 「한국 민주주의의 친구 조지 오글」(신앙과지성사)’ 헌정식이 있었다.

공동저자로 참여한 송병구 목사(색동교회, 고난함께 이사장)는 이 책에 대해 “기독교대한감리회, 연합감리교회세계선교국,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이 공동 기획했고 신앙과지성사의 수고로 만들어 졌다.”고 소개하며, “조지 오글 목사님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가장 큰 진실을 담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한국 역사와 민족 민중의 진솔한 목소리들을 가슴 뜨겁게 간직하시고 기록해 주신 조지 오글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헌정한다.”고 헌정사를 대신 했다.

한편,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노동자들의 인권과 한국의 평화 통일을 위해 애쓰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된 최초의 선교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명 오명걸)목사는 192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광부들의 마을인 피트케린 출신으로, 메리빌 대학과 듀크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국제노동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54년 미연합감리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20년간 한국 도시산업선교의 선구자로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법에 중점을 둔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서강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산업관계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기여했으며,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있을 때 군사재판에서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인혁당사건 8명의 ‘수호자 역할’을 하다가 1974년 12월 강제 추방을 당했다.

강제추방 이후에도 그의 한국 사랑은 끝이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에모리 대학교 켄들러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연합감리교회 사회경제정의 담당 총무와 일리노이 교회연합회의 총무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1984년 이후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고 1995년에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자녀 4명은 모두 인천에서 성장했으며, 아내 도로시 여사와 콜로라도 라파예트의 은퇴 커뮤니티에서 살다가 2020년 11월 15일 91세로 소천했다. 그의 죽음 직전인 2020년 6·10민주항쟁기념식 때, 국민훈장(민주주의발전유공포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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