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하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하는 순간 당신의 목회는 참 불행해질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하는 순간 당신의 목회는 참 불행해질 것입니다.
  • 최광순
  • 승인 2021.10.2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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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과 수직

목회하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하는 순간 당신의 목회는 참 불행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기본이 있습니다. 기본을 무시하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건축의 기본은 수평과 수직입니다. 건물이 수직으로 서 있어야 하고 바닥은 언제나 수평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일을 한다면 당신은 분명 건축의 초보입니다.

또한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하는 것도 수평과 수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추어란 건축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대충 일을 합니다. 프로는 처음에 시간이 걸리지만, 수평과 수직을 잡는 실을 띄우고 항상 일합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수평과 수직은 십자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수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수평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둘 중 하나라도 문제가 있으면 건물이 무너질 수 있듯이 신앙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요즘 목사의 이중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처음 일을 할 때였습니다. 주변 목회자들 대부분이 “언제까지 일할 거냐? 목회에 충실해라”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교단법상 당시에는 목회자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위법이었거든요. 현재 이중직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중직이 허용되지 않을 때와 법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중직이라는 말 자체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흑과 백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는 사고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사고관에서 시작되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양반을 중시하는 사고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양반처럼 굶어도 일하지 말고 책을 보듯, 성경과 기도와 전도에만 충실해야만 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의 목사들을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겸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겸직목회를 소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아도 크게 잘못되지 않았는데, 유독 한국교회만이 이것을 배척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교회의 수직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는 계속 뜨거운 감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중직 목회자의 수평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우니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목회자들의 상황은 좀 복잡합니다.

첫째, 일하는 목회자 다수가 패배감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를 만났지만 모두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목회자의 뜨거운 열정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이란 어쩌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일하는 목회자의 정체성의 혼란이 있습니다. 대부분 “내가 이 일을 하려 목회하고 있나?”라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일해야만 하는 정체성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목사인지 노동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중직(겸직)에 대한 생각은 ‘목회를 하기 위해 일을 하라!’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80%가 미자립이기 때문에 신학대학을 졸업하는 10명 중 2명만이 자립교회로 갈 수 있고 8명은 미자립교회로 가야만 합니다. 상위 20%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겠죠? 통계학적으로 대부분 80%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교회구조입니다. 나무 위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교인 한두 명일지라도 행복한 목회를 위해 일을 하라는 것이죠. 수백 명의 군인이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단 한 두 명이 보초를 서야 하는 휴전선의 초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수백 명의 사람도, 한두 명의 사람도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 또한 달란트의 비유로 보자면 차별이 없습니다.

목회하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하는 순간 당신의 목회는 참 불행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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