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중하탕의 맛을 아십니까?
혹시, 중하탕의 맛을 아십니까?
  • 남광현
  • 승인 2021.10.02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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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의 큰 시름이 한숨이 되어 포구를 짓누르는 모습을 해거름 하여 본다. 최근 들어서 지구 온난화 현상의 결과라고들 말하는 일들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을 앞바다에 갑자기 문어가 떼로 잡힌다든지, 어패류가 자취를 감춘다든지, 처음 보는 아열대 생선들이 그물에 든다는 것들이다. 다들 문어가 많이 잡히면 수익에 더 도움 되는 일 아니냐 말하고, 어패류는 해양오염의 결과로서 어부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며, 다른 생선을 잡으면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문어가 출현하면 먹이사슬에 의해 꽃게와 같은 갑각류가 사라진다고 한다. 마을에서 고부가가치를 내는 아주 작은 새우(자하-우리 지역에서는 이렇게 부른다.)가 사라지면 전어잡이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탓인지 올해는 멸치와 전어가 귀하다.

요즘 시기가 되면 어부들이 다루는 그물이 달라진다. 멸치잡이 배들이 가지고 있는 그물은 변함이 없지만, 연근해 어업이 생활 수단인 작은 배를 운용하는 어부들은 튼튼하고 억센 그물을 배에서 내리고 거미줄같이 가느다란 그물을 손질하여 올리게 된다. 꽃게와 대하(새우)를 잡기 위한 채비이다. 재미난 풍경은 이 시기만 되면 마을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 남, 여 구분 없이 손이 바빠지는 모습을 보는 일이다. 마을 집 집마다 마당에 파라솔이 한두 개씩 세워지고 노부부가 온종일 묵언수행 하는 모습이다. 꽃게와 대하잡이 어부들이 그물을 수리하고 만드는 일을 마을 노인들에게 부탁하기 때문이다. 평생 그물을 깁고 수리하며 살아왔기에 노년에 쏠쏠한 용돈벌이가 가능한 일이고 이런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마을에 노인치매 환자가 거의 없다. 꽃게나 새우를 잡으면 그물이 워낙 가늘어 얽히고, 설키게 된다. 활 꽃게를 사면 가끔 녹색에 가까운 연두색 실 같은 것이 꽃게의 집게다리나 몸통에 걸려있는 모습을 본 경험들이 있을 터인데 그 실이 바로 그물이다. 마치 실타래가 엉킨 상태와 같기에 그물을 풀어 꽃게나 대하를 선별하기 어려워 그물을 잘라내는 경우가 더 많다. 상황이 이렇기에 꽃게와 대하를 잡는 철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바닷일과 그물 일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이런 실정이기에 어부들은 마을 어르신들의 손길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마을 분 중에는 추석을 전후해서 지친 기색이 분명한 모습으로 교회 마당에다 꽃게와 대하가 섞여 있는 망태기 하나를 던져 놓으며 맛이나 보시라 말씀하시고 무심하게 돌아서 가신다. 피곤함이 지나쳐 지치고 지친 모습으로 교회까지 올라와 건네주는 그것은 어부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자가 전화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게 되면 항상 하시는 말씀들이 있다.

“사모님 꽃게는 냉동시키지 말구 얼른 드셔야 돼유, 가을이라 봄 하구 달러유”

“그리구 새우는 그게 중하여유, 아직은 대하가 안 잡히는데 중하도 맛있어유”

“중하도 구우면 대하만큼이나 달어유”

“근디, 중하는 탕으로 드시는게 훨씬 맛있으니께 한번 호박이랑 고추 넣고 자작자작하게 끓여 드셔봐유….”

어촌 아낙들의 중하탕 레시피를 생생하게 들을 기회가 된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그리고 교회에서부터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분명하게 보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무리 지쳐도, 생물은 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알고 있기에 지친 몸이지만 언덕 위에 있는 교회 마당까지 이끌고 올라오는 그 마음이다. 이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리라. 분명한 것은 거저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 여정 속에서 거둔 열매이기에 귀하고 아까울 수밖에 없을 것인데 나눔을 행하고 또 그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술판이 벌어진 포구의 포장마차를 지나치다 보면 정겹게 인사를 건네오며 함께한 동료들에게 너스레를 떠는 일들이 있다.

“이번에 내가 잡은 꽃게 실했쟌여? 그거 한 망태기 목사님네 드렸네”

“그려, 나두 지난번에 중하 겁나게 잡었쟎여, 탕 한번 끓여 드시라고 식구 편에 보냈는디 사모님이 맛있었다구 전화 주셨는디 중하탕은 처음 드셔보셨다네 그려 참네...”

등 뒤로 들려오는 이야기는 꼭 어린아이들이 벌이는 자랑 싸움처럼 어부들의 자존심이 묻어나는 자랑으로 들렸고 그 소리는 필자에게 한 걸음 더 주님을 닮아가게 만드는 큰 소리로 들렸다. 적어도 필자에게 어부의 자존심은 중하탕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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