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서른세 번째 이야기
큰나무 서른세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1.07.22 0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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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묘목 장사에게서 다섯 그루의 봉숭아 나무를 사서 공터로 남아 있던 땅을 대충 고르고 두 팔 간격을 두고 심은 나무는 삼년이 지나서야 꽃을 피웠다. 과수원 경력이 있는 내게 다섯 그루의 복숭아는 의미 있는 성과를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성장의 전 과정을 아이들과 함께 보고 열매를 따서 나누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가꾼 것이 어른 주먹 크기의 열매를 가득 달고 수확을 기다리는 모습이 대견하다.

나무 밑에 집결한 아이들은 시작하라는 신호와 함께 채 십 여분도 되지 않아 노란 사각 바구니에 한가득 붉은 복숭아를 담아낸다. 이 소소한 행복을 얻기 위해 여간 손이 가는 것이 아닌데 복숭아를 시작으로 자두와 사과나무 체리나무 슈퍼오디 등 종류가 해를 거듭하면서 늘어가고 있다.

초여름 이면 아이들은 검게 익은 오디를 먹고 온통 물든 손과 입을 옷에 문지르는데 옷도 금새 검붉은 오디 물이 든다. 어떤 아이는 엄마에게 준다며 따로 비닐봉지를 달라하여 한줌 싸서 가방에 넣어 가기도 한다. 복숭아는 아이들이 선호하는 과일로 식당에 씻어 쌓아두면 드나드는 아이들이 연신 입에 물고 사라진다.

자두는 센터 캠프 철과 수확 시기가 같아 캠프 때면 간식으로 요긴하다. 찬바람이 불고 무서리가 내리면 사과를 따서 얼지 않게 드려놓고 겨울을 맞이한다.

지난겨울 동해를 입어 두 그루의 복숭아나무는 수명을 다하고 남은 나무도 건강해 보이지가 않았는데 열매를 키워 냈다.

자연은 신비하게도 생명이 있으면 어떻게든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 동해를 입은 나무도 수관이 얼어 제 기능을 못해 서서히 말라 죽어 가면서도 환하게 복사꽃을 피웠다가 삶을 다했다. 죽음의 순간조차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가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부여된 존엄이다.

존엄이 다른 존엄을 취하여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억만을 이어온 방식이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질서가 있다. 아직까지 인간이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질서의 흐름을 통해 생명 세계가 유지 된다.

생명의 질서가 무너지면 세계는 온통 생명들의 절규가 끊이지 않는 지옥으로 변한다. 우리가 격고 있는 질고는 생명의 존엄을 인식해야하는 가장 존귀하게 창조 된 피조물이 욕심을 따라 질서의 파괴자가 된 죄의 결과물이다. 죄가 깊으면 인식의 기능이 마비되어 자신의 잘못을 지각하지 못한다. 세상이 죄로 인한 고통을 격으면서도 여전히 죄를 거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성하지 않으면서 삶의 조건이 나아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은 생명과 질서를 주신 이를 모독하는 것이다.

찌는 더위에 마스크를 쓰고 힘든 노동을 감내하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하루가 너무나 길다. 땀에 젖은 마스크가 가뜩이나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농부의 숨을 트러막는 절망 같은 현실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가 없다.

달콤한 향이 나는 복숭아를 입으로 쉬 가져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은 오늘의 죄 됨이 서글프고 세상을 병들게 한 죄책으로 초라해진 모습이 주님의 거울에 비춰진 까닭이다.

“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14:31)

밤공기에 잠시 더위를 물린 마당으로 나가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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