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스물 여섯 번째 이야기
큰나무 스물 여섯 번째 이야기
  • KMC뉴스
  • 승인 2021.03.2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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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을 향해가는 삼월은 슬픔과 환희가 겹을 이른다. 매운바람 속에 이른 봄꽃이 피고 눈 녹아 흐르는 차디찬 냇가에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는 작은 몸부림으로 사월의 따뜻한 태양을 맞으러 오늘을 힘겹게 견디는 시간이다. 그 여린 생명 안에 무슨 힘이 있어 한 자락의 햇살로 살얼음이 어는 삼월의 밤을 새우는지 알 길이 없다.

인간이 지니는 모든 윤리적 가치와 예술로 승화 된 아름다운 표현과 지고한 철학과 문명화 된 사고가 일시에 함몰 되고 추악한 어둠이 되고 광기가 되어 끈적이는 핏방울에 엉켜 붙는 삼월의 마지막 밤은 사월을 향한 모퉁이 끝에 위치한 골고다 언덕길 돌무더기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작은 연민도 사치가 되어 벌거숭이의 부끄러움으로 사월을 맞는다.

심장을 지닌 자로 견 눈질로도 볼 수 없는 민망한 자아가 고통으로 절규하는 선한자의 맨몸에 덧 씌워져 있다. 사월로 가는 이 처절한 밤은 인간의 욕망을 다듬어 세운 성전이 돌 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고 부서지고 허물어져야 사월의 아침을 맞을 수 있다.

부활의 영롱한 열매로 맺어지기에는 터무니없이 죄 된 자가 사월의 문턱을 기웃거리며 한없이 자비하신 주님의 눈에 발견되어지길 소망한다.

며칠 전 동네 철물점에 들러 날이 선 끌을 하나 샀다. 이웃 교회 목사가 교회 전면에 붙은 십자가가 스크린에 가린다고 전면 귀퉁이에 입식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싶다고 하여 십자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서 선 듯 답을 했는데 막상 십자가를 만들려고 하니 여러 걱정들이 생겨 났다. 그들의 맘에 드는 십자가는 어떤 모양일지 교회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커다란 통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있는데 장로님이 보시고 무엇하고 계신지를 물어 오셨다. 십자가를 만든다고 하고 예쁘지 않으면 어떡하지를 걱정하자 십자가가 예쁠 이유가 있나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왠지 묘한 감동과 차원이 다른 곳으로 생각을 옮겨 놓고 말았다.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기 이전 흉악한 죄인을 본보기로 죽이는 사형 도구였다는 것과 인간의 공포를 이용한 기만과 허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을지, 삶의 욕망과 공포에 마비 된 인생들이 여전히 십자가에 누군가를 매달고 고함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서글픔이 끌질을 하는 손에 힘을 빼고 있었다. 이들을 위해 십자가를 만드는 자의 삶은 영혼조차 없는 공허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미칠 때는 눈물마저 글썽이게 만든다.

인생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함치는 무리 속에서 자신이 발견되어지고 일상에서 무수히 십자가를 만들어 파는 자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감각이 무디어진 삶은 끌질의 무게만을 느낄 뿐 공허한 영혼을 돌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를 평범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날카로운 칼날에 손을 벤 사람보다 두부에 목이 메어 질식하는 자가 더 위험하다. 평범에 기댄 삶이 숙고와 반성을 저버리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하고 만다. 교활한 자의 잔꾀와 무지의 평범이 만나는 자리는 가난한자들과 선한 자들의 절규가 십자가를 타고 하늘에 닫는다.

생각에 잠긴 사이 나무는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더 이상의 끌질이 필요 없음을 알려온다. 십자가는 예쁠 필요도 멋을 부릴 필요도 없다. 주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지친 어깨를 돌리며 바라 본 삼월의 하늘은 무심하기 그지없고 어리석게 십자가 만들고 있는 무지한 자의 머리 위로 봄볕이 따스한 것이 저린 아픔으로 다가 선다.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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