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실수 해프닝?
헌금 실수 해프닝?
  • 민돈원
  • 승인 2021.01.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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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서울에서 목회할 때이다. 기도훈련학교를 몇 팀으로 나누어 실시할 때에 겪은 일이다. 그 팀중에 장로님 들과 다른 몇 분들이 한 그 그룹이었다. 이 과정을 시작하기 전 오리엔테이션으로 하나하나의 과정이 훈련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하기에 마치 군대에서 모두가 계급장 없는 훈련병처럼 직분까지 다 내려놓는 자세로 겸손히 임하도록 부탁했다,

교재로 기도에 관한 책을 선정해서 1시간 강의를 한 후 약 30분~1시간 가량 함께 통성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장로님 중에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분이 다들 통성기도를 하는데 하지 않고 묵상하고 있었다. 이에 정중하게 물었다. ‘장로님은 통성기도가 잘 안되시나요?’ 장로님은 조금은 멋쩍은 듯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그렇게 하면 헤까닥 하게(?) 될 것 같아 그럽니다.’라고 해서 적잖게 놀란 적이 있다. 어머니 때부터 신앙생활 해 온 분인데 훈련의 차원에서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도 몸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을 하기에는 그의 지성의 한계로는 어떤 점에서 용납이 안 되는 측면이 있었으리라 본다.

지금도 혹시 그런 통성기도는 좀 고상한 지성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분들은 성경에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고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듭된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사 다른 민족에게 파셨을 때 돌이켜 부르짖음, 사무엘 어머니 한나, 히스기야가 그리고 예레미야 등 선지자서 등에서 통곡했다는 말씀을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다.

어디 성경이 우리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가 되고 해석되는 게 얼마나 되랴? 그렇지 못한 진리들이 훨씬 더 많다.

신앙생활 하면서 깨닫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섭리란 사람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역사를 말할 때 사용한다. 즉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운명이니 숙명이니 라고 한다든가, 또는 인연이니 우연이니 라는 용어와 정반대 개념이다.

예컨대 어떤 일이 잘 되든 안 되든, 선한 역사든 악한 역사든, 그리고 내가 의도한 일이든 아니면 때로는 실수한 일 등까지도 합해보면 결국 그 모든 일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선한 뜻, 즉 하나님의 섭리였다. 라고 하는 차원이 성숙한 신앙인에게서 볼 수 있는 증거라 하겠다.

이번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재무부장이 ‘목사님, 아무 아무개가 지난주 헌금을 더 냈다고 얼마를 돌려주라고 하네요. 그 액수를 마이너스 처리해야겠어요.’라고 했다. 그런 그 당사자가 내 앞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자초지종 다시 물으니 이야기인즉슨 지난주에 십일조 헌금 얼마를 했는데 잘못 계산하여 얼마를 더 헌금하게 되었으니 그 추가분을 재무부장에게 전화해서 돌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무부장이 ‘다음 주일(이번 주)에 그렇게 하마!’라고 했나 보다.

듣고 나니 좀 황당했다. 하지만 일단 당사자에게 그런 일에 대해 이해를 시킨 다음 다시 오후 예배 후에 그의 모친인 권사님과 함께 불러서 일어났던 어찌보면 코메디같은 일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사실 그 당사자는 아주 순진한 집사이다. 약간은 이해력이 약간 부족하지만 제조회사에 다니며 월급도 괜찮게 받는 성실한 청장년이다. 종종 몸이 아프면 전화한 다음 교회로 찾아와서 나에게 기도를 받곤 하는 집사이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를 만큼 순박하기만 하다. 아마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이번 주 주일 설교가 우연이 아닌 필연적이라 할 만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였다. 그래서 그 집사님에게 ‘오늘 설교가 하나님 섭리였는데 벌써 잊었어?’라고 웃으면서 물었다. 어머니 권사님도 내 입장과 똑같이 ‘우리 애가 순진해서 그래요.’ 라고 인정했다. 전혀 악의나 불평이 있어서가 아닌 것을 나도 잘 알기에 이렇게 권면했다. ‘집사님, 헌금은 이번처럼 실수해서 더 들였다고 하드래도 아!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가 보다. 많든 적든 (더 드린 액수가 적은 단위이다.) 하나님께 드렸으니 거스름돈 내주듯이 헌금은 그런 게 아니여!, 하나님이 그거 좀 더 헌금한 걸 잘못 계산했다고 반환해 주마 그러진 않아. 오히려 드려야 하는데 슬쩍 감추고 하나님께 전부라고 하며 드린 아나니아 삽비라에게는 그 책임을 묻고 있잖아?’

사실이 이 정도가지고 장황하게 설명할 일도 아니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의외로 이런 부분을 모르고 지속하면 안 되기에 헌금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는 착각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게 된 기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혹시 헌금은 해야겠는데 오만원 현금을 가진 사람이 만원만 헌금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4만원을 거슬러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또는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고 하니까 1,111,000원 수입이 있는 사람이 111,100원 십일조 한다고 과연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누구도 그를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사회거리두기로 교회와 멀어지고, 모임이 중지되고, 신적인 터치(Heavenly touch)가 약화 되어가는 이 시대에 목회자들이 정신 차리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본다.

이때일수록 더 분발하여 복음을 잘 전해야겠다. 헌금 생활도 잘 가르쳐야겠다. 기도도 하도록 훈련 시켜야겠다. 말씀도 제대로 연구해서 가르쳐야겠다. 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에 대한 절박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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