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What이 아니라 Who이다.
교회는 What이 아니라 Who이다.
  • 민돈원
  • 승인 2021.01.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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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광의의 의미에서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란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사상,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또한 심리학(心理學, psychology)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부르지만, 그 접근방법에 있어서는 수십 가지 이론으로 다양하다.

이에 반해 신학(神學, Theology)은 인간이 아닌 어떤 종교의 신, 교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학문 이외에 인간이 일반 여타학문처럼 과연 신을 연구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신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모순이고 무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극히 제한적인 지성으로 초월적인 신을 연구하고 추론한다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도전이요,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학을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내면을 진실하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존재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솔직히 규정하는 이 작업부터 선행한 다음에야 비로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고 이에 따른 교리도 체계화시켜 갈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즉 인문학, 심리학을 통해 나 자신이 먼저 규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도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이것도 과연 우리 죄성으로 인해 아무리 탁월한 지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교만이다. 이에 대해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 거룩한 성령의 강한 임재속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구약성경 시편과 잠언에서 어떤 사람이 악한 자이고, 어리석은 자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해주고 있다.

어리석은 자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요 이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여(vile비열함, 몹시 불쾌함) 선(히브리어 ‘토브’, good)을 행하는 자가 없다.”(시14:1) 라고 말씀하고 있다.

동시에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도 시10편에 악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고 있다. 악인이란 단지 선의 반대 개념에 국한하지 않는다. 악인은 누구인가? 악인은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교만한 얼굴로 스스로 말하기를 여호와를 배반해도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즉 그런 행동에도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라고 하나님을 부정하며 그 사상(계획과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고 경멸하는 자(시10:3-4)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을 하든 심리학을 하든 아니 신학을 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악인이요 어리석은 자로 일생을 마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What)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Who) 라는 존재론적인 물음을 던지며 살아야 한다.

시15편은 5절의 짧은 내용임에도 바로 존재론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 “Who” 라는 인칭 대명사가 무려 10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사람, 그 성산에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음을 던짐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첫째 스스로 진실과 공의 정의로 자신을 돌아보는 자, 이어서 이웃을 허물하고 비방하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망령되이 행하지 않는 자, 이들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신다.

바둑의 고수들이 한판 두는데 361수(19X19)를 두는데 이 프로기사들은 끝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복기가 가능하다고 한다. 어떻게 이미 놓은 수를 다시 복기할 수 있을까? 그들 대답은 ‘한 수 한 수를 의미없이 놓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우리 신앙생활을 다시 한번 총체적으로 돌아보게 해 준다.

40년, 50년, 60년, 아니 일평생을 교회 다닌다 하면서도 안하무인격으로 아무에게나 대들고 사람도 못 알아보고 얼굴이 사나워 ‘저 사람만 없으면 교회가 평안할 텐데...’ 하며 주위 성도들은 물론 이웃에게 불안의 대명사로 손가락질당하며 여전히 교회를 출입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존경스럽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실망했다가도 그분을 만나면 다시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그런 덕장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What이 아니라 Who이다. 복음이 분명해야 사람이 바뀐다. 행실이 바뀐다. 얼굴의 자화상이 바뀐다. 복음 없이 직분 가지고 행세하다 보니 교회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주장한다. 교회공동체가 교회를 잘 섬기라고 준 직분 가지고, 직책 가지고 호령하는 자가 아니다, 감리회 교리와 장정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안다고 고함치고 불화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것 좀 몰라도 복음에 생명을 건 삶이요, 배후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섬기는 그의 인품이요 덕을 세우는 삶이요, 나아가 주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백배 천배 먼저이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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