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스물 두 번 째 이야기
큰나무 스물 두 번 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1.01.14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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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 일이다. 군청으로부터 용납하기 힘든 끔찍한 주문을 받았다. 당시 나는 아이들에게 닭장을 하나 지어 주었다. 백 여 평의 대지에 철망을 두르고 날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골프 망으로 지붕을 덮었다. 닭장 안에 작은 하우스도 만들어 닭들이 비를 피하거나 밤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배설해 주었다. 스무 마리의 병아리를 넣고 이들이 자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은 행복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달려온 아이들은 닭장을 둘러서서 병아리의 뛰노는 모습에 탄성을 지었다. 이들이 어미닭이 되고 알을 낳고 이를 품어 병아리가 태어나는 과정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해 겨울 전국은 조류독감으로 비상사태였다. 내가 사는 시골 오지 마을도 그 영향권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웃하고 있는 이십만 마리의 닭을 사육하는 거대 농장을 지키는 것은 군청의 입장에서 너무도 급박하고 중대한 일이었다. 하여 인근 소규모 농가의 닭들을 폐사시켜 거대 조류독감의 전파과정을 차단하는 정책을 폈다. 약간의 보상금과 함께 이루어진 폐사작전은 아이들과 함께한 닭장에 까지 미치고 말았다.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고도의 방역 수칙을 지키고 소독을 정기적으로 하는 것인데 일반 농가가 담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이십만 마리를 보호하기 위해 이십 마리의 닭들은 무참히 도륙당하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생명교육을하는 장이 하루아침에 지옥이 되고 만 것이다.

생명의 가치는 많거나 크거나 작거나 어리거나 다하나같이 귀한 것이다. 이를 함부로 하거나 침해할 권리가 사람에게 가한 것일까.

사람됨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의 인식일 것이다. 이 인식을 뒤로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허위이고 야바위가 된다. 종교는 생명의 가치를 인간 선택의 영역이 아니 신의 신성한 영역임을 알게 하고 윤리의 강을 만들어 인간 내면에 흐르게 한다. 이로 인해 사람의 삶은 비옥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최근 이 강이 말라 버리거나 처음부터 수로를 내지 못하고 살았을 것 같은 참담한 사람들의 보도를 듣고 목회와 성도들의 삶을 다시금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다. 항간에 들리는 그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소위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태생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한 번도 교회와 분리 된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신앙의 엘리트들이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보여준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고 때때로 그리 살지 못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적 속살이 드러나면서 슬픔과 절망이란 단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영혼의 동공을 만들고 말았다.

은혜의 단비로 표현 되는 그 많은 가르침과 설교와 교회적 활동이 사람의 영혼에 단 한 방울도 스미지 못하고 표면만 적시고 만 것이다.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리는 광체는 많은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환호 하게 했으며 때때로 감동의 눈물로 다가 왔다. 성령 충만 한 것 같은 집단적 최면은 큰 폭발음을 내며 사회를 진동시켰다. 놀라운 것은 여기가 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면에 스미고 변화시키고 사람의 것이 아니 하늘의 것을 덧입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한 회칠한 무덤이었다.

이런 일들을 목도하면서 사회는 종종 반성의 언어로 유감을 드러낸다. 반성이라면 외양간을 고치는 차원이 아니라 다시 짓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는 것이 믿음 일진대 그를 배우고 가르치려면 아프지만 영혼에 깊은 골을 파고 물을 대는 작업을 시작해야한다.

나의 목회가 성도들의 삶에 물만 바르며 살고 있지 않은가라는 깊은 고뇌로 밤을 세운다.

눈이 시리게 내리는 날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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