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님과 함께한 1주일 일지
나의 아버님과 함께한 1주일 일지
  • 민돈원
  • 승인 2021.01.0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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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우리 7남매를 합쳐 9식구가 마루 1, 방 2개인 집에서 당연히 주어진 환경임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농촌지도직 공무원이셨다. 그러다 보니 출근하시기 전 잠깐, 그리고 일찍 퇴근하실 경우 짬짬이 시간을 내서 집안을 돌보시고 농사일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외의 집안일, 농사일 등은 어머님의 몫이었다. 당시 내가 기억하기로도 지금이야 공무원 대우가 좋지만 60~70년대는 학자금도 나오지 않는 박봉에 시달리다 보니 7남매를 가르치는 데는 보통 버거운 게 아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광주로 진학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 생활과 하숙을 하게 되었다. 방학 때나 간간히 부모님을 만날 뿐이었다. 고교를 졸업 후 대학과 취직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어 더군다나 고향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방학이나 명절 때 찾아뵈는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기간이 내 인생의 1/4도 채 되지 않은 셈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부모님은 어느새 젊을 때 고생하신 몸의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어머니는 허리가 많이 굽어져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80중반의 연로한 노인이 되었다. 동갑 나이이신 아버님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웬만히 힘든 일도 소화해 내실 정도로 건강하신 편이었는데 지난 연말부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오면서 담도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불과 1~2개월 사이를 두고 우리 형제들의 관심은 아버님께 쏠리게 되었다. 부모님과 형제들과의 상의 끝에 내가 사는 강화로 아버님을 모셔와서 통증 없이 평안히 지내기를 기대했다. 그리하여 부모님은 지난해 연말 12월 28일 오셔서 몇십 년 만에 부모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되었다. 아내가 매끼 식사 챙겨 드리느라 고생이 되겠지만 병환 중에 계신 아버님을 잘 섬겨야겠다는 마음에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자식의 도리라고 여겼다.

오시던 첫날 아버님은 중한 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밖에 있는 교회 주변의 쓰레기 등을 정리하며 소각하시느라 쉬지를 않고 일하셨다. 그런 의지가 있으실 만큼 몸을 잘 가누셨다. 송구영신 예배 때도 밤10시 반에 모여 자정이 넘어서까지 두 가지 기도 제목을 기록하시고 아들에게 안수기도를 받으셨다. 아버님의 두 가지 기도 제목은 ‘제 건강을 회복시켜 주소서.’와 ‘새해에는 막내아들이 구원받게 해 주소서.’였다. 그리고 신년 첫 주 예배 때도 같은 기도 제목으로 예물을 드리셨다.

몇 일간 매끼 식사도 한 그릇씩 거뜬히 드시며 잘 지내셨다. 그러다 지난 토요일부터 아버님이 약간의 통증이 오면서 입맛을 잃으셨는지 식사량이 현저히 줄어들고 누워 계신 시간이 늘어갔다. 사실 이곳에 오실 때 담관에 담즙 배출을 돕는 ‘배액관’을 삽입한 상태였다. 완전한 치료방법이 아닌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리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어제 주일 새벽에는 고열이 나고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좀 오후까지는 오한도 멈추고 열도 떨어졌다. 그러나 상태가 갑작스럽게 위중할 것을 대비하여 맨 처음 ‘배액관’ 삽입을 한 그 대학병원이 있는 광주로 급히 동생이 모시고 새벽에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선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했고 결과는 음성이었다. 겨우 정오가 넘어 몇 가지를 검사한 결과 담당 진료 의사는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면서 중환자실로 입원처리를 했다.

아버님은 안 그래도 어제부터 식사를 제대로 못하셨는데 또 다시 검사와 시술을 위한 금식을 해야 하는 이중삼중고의 고통을 받고 계시다. 지난 일주일간 강화에 계시면서 주변 바다 쪽 나들이를 하면서 구경도 시켜드리고 외식도 하느라 어느 한식 식당에 갔더니 강화 쌀이 기름지고 맛있다고 하시면서 한 그릇 반을 드실 정도로 식사도 잘 하셨던 것과 비교하면 믿어 지지가 않고 실감이 나질 않는다.

더욱이 면회가 되지 않고 통화도 안 되는 중환자실에 계시다니 마음이 몹시 아프다. 게다가 다시 떨어져 있으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뵙고 싶으면 마음대로 뵐 수 있었던 내 아버님과 하루 사이에 이렇게 된 걸 목양실에서 생각하고 있노라니 하염없이 눈물만 솟구친다.

아버님이 연세(84세)가 많으시고 병이 찾아오면서 드는 생각이다. 죄 다음으로 나이만큼 무거운 게 없는 것 같다. 병만큼 무거운 게 없는 것 같다. 7남매 키우시느라 희생한 나머지 지난날 못 드시고 못 입고 못 쉬고 대신 고된 삶을 사시느라 이 두 가지 무거움을 다 지셨으니 얼마나 힘드시랴? 그런데 문제는 죄는 물론이거니와 이 두 가지를 자식인 내가 대신 질 수 없고 덜어줄 수가 없다는 무력함과 인간의 한계상황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분명한 한가지는 우리 주님은 죄 짐을 풀어주셨고 이 두 가지 무거운 짐과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요, 담당하신 분이기에 문제를 바라보는 게 아닌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님의 남은 생애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 맡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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