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열아홉 번째 이야기
큰나무 열아홉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0.12.0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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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원주에 있는 자그마한 백화점 로비에 서성이고 있었다. 이날 나는 내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탈탈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난생 처음 내 돈을 주고 손목시계를 사기 위해서였다.

내게 있어 손목시계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물건이다. 아버지는 젊어서 시골 부자로 사셨다. 방앗간과 작은 양조장을 가지고 계셔서 물질적으로 나름 풍족한 삶을 사셨는데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산의 대부분을 잃는 아픔을 격구셨다. 그 후 한가로운 시골생활을 접고 도시로 이주하셔서 건설현장의 노동자로 살아가셨다. 건설현장은 당신이 일찍이 격지 못하셨던 위험과 힘든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이면 지칠 대로 지친 아버지의 모습은 가족들 모두를 안타깝게 했지만 여섯 식구의 생활을 책임진 아버지는 고된 노동을 포기 할 수 없었다.

내가 대입시험을 치르기 얼마 앞든 어느 날로 기억난다. 내방 문 앞에서 나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동으로 거치러진 아버지의 손에 예쁘게 포장된 사각의 선물박스가 들려 있었다. 불쑥 박스를 건네주고 씻으러 욕실로 향하시면서 사내는 시계를 차고 다녀야 해 라고 말하셨다. 박스 안에는 제법 고급시계가 메탈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흔하지 않은 아버지의 선물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지만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모든 인사를 마쳤다. 아버지가 여러 날의 용돈을 아껴서 사신 선물이었다.

그 때 나는 아버지의 맘을 헤아리지 못했다. 나를 향한 사랑과 기대가 그 손목시계 안에 담겨져 있었다. 당신의 맘을 전달할 방법을 찾으시다 시험을 앞든 내게 시계를 사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몹시도 추웠던 시험 날도 아버지는 일터로 가셨다. 낡은 자전거에 오르시는 아버지의 눈에 반짝이는 물기를 보였다. 멀어져가는 자전거가 가슴에 영상으로 남아 겨울이면 아픔과 그리움으로 나를 괴롭게 한다.

백화점 안은 코로나의 영향인지 한산하기 그지없다. 1층에 마련된 잡화점 구석에 언젠가 들어 봄직한 유명 메이커의 시계점포들이 일렬로 자리하고 있다. 점포들을 한 바퀴 돌고 젊은 취향의 시계로 가득 채워진 진열대 앞에 섰다. 점원이 환한 미소로 맞이해 준다. 아들에게 줄 선물을 산다하자 아들의 나이를 묻지도 않고 젊은이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시계를 골라 보여 주었다. 그중 한 개를 골라 조심스럽게 얼마예요 하고 가격을 물어 보았다. 백만 원이 넘는 물건이었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다른 시계들의 가격을 차례로 물어 보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 있었다. 다른 점포에 들렸지만 약간의 가격 차이가 있을 뿐 가격이 거기서 거기였다. 지갑 속 카드가 생각나 꺼내들고 만지작거리다 다른 점포를 찾아 다시 걸움을 옮겨야 했다. 그날 나는 수십만 원대의 시계를 사고 행복한 가난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내가 시계가 좋아 보이는데 얼마야 라고 물어 왔다. 나는 얼버무리며 가격을 말하지 못했다. 아내는 이내 상표를 보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시계의 가격을 알아내고 가늘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들로만 살다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장성해서야 아버지 눈가에 매친 눈물의 기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오늘이 거저 만들어진 오늘이 아니라 당신의 눈물의 결과라는 사실을 조금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어서 고맙고 감사하다.

죄인 된 나를 위해 아들을 내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식이 아닌 삶의 고백으로 다시금 다가와서 코끝이 시큰해진다.

차가운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종탑 위 십자가가 유난히 밝아 보이는 밤이 깊어간다.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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