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요셉이 좋다
난 요셉이 좋다
  • 이구영
  • 승인 2020.11.27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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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라헬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가정적으로 환경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아장 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따라 다른 사람도 아닌 외삼촌 라반의 칼을 피해서 야간도주를 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구분하기도 전에 이미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외에 다른 계모들이 3명 더 있었습니다. 신데렐라나 콩쥐, 백설 공주의 힘든 인생에는 계모가 한명씩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이 계모가 세 명 있었습니다. 콩쥐 에게는 팥쥐 라는 못된 언니가 있었고, 신데렐라나 백설 공주는 경쟁적인 사람이 한명 혹은 두 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10명의 배다른 형들이 있었고 그들의 구박 속에 살았습니다. 행복했을까요? 얼마나 동생이 미웠는지 형들 10명은 달려들어서 요셉을 죽이려고도 했고, 집단 폭력도 당했고,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이국땅 애굽에 팔려 와서 하루아침에 노예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자유를 잃고 보디발이라는 애굽 왕 경호실장 집의 가사 도우미가 됩니다.

요셉의 삶은 이처럼 원망이 매일 마다 나와야 하고, 한탄이 한숨이 매일 마다 나와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런 말이 안 나옵니다. 너무 잘하니까 그가 20대 후반의 청년이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성적인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거절한 것 때문에 요셉은 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억울하지요. 한숨이 저절로 나오고 답답한 지경입니다.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감옥에 들어온 고위 공직자 한 사람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곧 억울함을 풀 수 있겠다 기대도 했는데 그것마저도 좌절되고 또 계속된 감옥 생활을 하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이런 요셉의 삶에서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왜 그는 원망이 없었을까 입니다. 당연히 원망 불평을 해도 될 상황인데 그는 왜 원망이 없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똑같이 힘든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상황을 원망의 계기로 삼아 신세타령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절망과 미움, 다툼과 감사 없음의 삶을 살았지만 요셉과 같은 사람들은 그 힘든 상황을 하나님을 찾는 계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런 악전고투의 쓰라린 삶을 오히려 하나님을 찾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힘들기 때문에, 연약함을 알고, 한계를 알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사람 의지해야 실망하게 됨을 알기에, 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기에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있습니다. 상황이 안 좋으니까 더욱 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식히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 하나님께 파고 드는 사람들! 요셉은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참으로 어렵고 힘들고 꼬여있는 내 삶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계시니, 내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내 성공과 실패가, 내 승리와 패배가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하나님만 바라보자!! 그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다 죽일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들을 용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50:19-21]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① 요셉은 형들을 의지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을 더 바라보았습니다.
. 형제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 아버지를 계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② 요셉은 보디발을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자기에게 너무 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디발이 자신의 무죄를 알면서도 감옥에 가두었을 때 원망이나 배신감이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요셉은 원망이나 배신감 혹은 보복에 대한 생각을 깔끔히 정리해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상상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는 또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정직하게 공의롭게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③ 요셉은 감옥에 갇혀있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후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면 도와달라고 부탁도 한적이 있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아주 많이 서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서운할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에 요셉은 오히려 이것을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길이 있습니다.

④ 형들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사랑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⑤ 보디발이나 보디발의 아내, 술 맡은 관원장을 비롯해서 자신에게 억울함과 배신감을 주었던 이들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도 그는 그 모든 상황을 사랑과 용서의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까... 이러실 수 있으세요? 제가 절대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원망을 많이 하고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용서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변명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사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스스로 억울한 감정이나 서운함을 털어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감사할 때 감사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다가가야 할 그 좋은 상황적 어려움을 원망으로 풀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안 되었고 불쌍한 것 맞습니다.
난 능력 있는 남편이 없다 / 난 자식이 없다 / 난 돈이 없다 / 난 힘이 없다 / 난 아내가 없다 / 난 아버지가 없다 / 난 고아다 / 난 머리가 안 좋다 / 난 몸이 약하다 / 난 외모가 딸린다 / 난 키가 작다 / 난 당뇨병이다 / 난 고혈압이다 / 난 관절염이다.

그래서 원망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서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보상받으려 하고, 기가 죽어 살고, 열등감에, 낮은 자존감에 허덕이는 바보들을 더러 봅니다. 답답하지요, 감사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다가 광야에서 죽은 바로 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저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사나? 힘드니까, 아프니까, 없으니까. 외로우니까 하나님께 더 파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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