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은 에서!
닮고 싶은 에서!
  • 이구영
  • 승인 2020.11.20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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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에서를 싫어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을까요? 혹시 말라기 1장 2절의 말씀 때문이라면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시각으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야곱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느냐고?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에서는 장자라고 해도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너를 사랑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동생이, 엄마는 언니만 좋아한다고 하니까 엄마가 달래면서 이야기 합니다. 아니라고, 언니도 예쁘지만 너도 예쁘다고... 동생이 좁은 머리로 이해를 못합니다. 어떻게 언니도 좋고 나도 좋으냐고 나만 좋아야 진짜지. 이 멍청한 동생 야곱을 달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적도 있으십니다. 내가 에서는 미워했고 너는 사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에서를 아주 많이 미워하신 줄 아는데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에게도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단지 그가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하면서 자녀교육에 실패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녀들을 두게 되어 믿음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에게도 배울 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서의 용서와 양보는 성경의 잊혀 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① 에서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형으로 태어납니다 [창 25:25-26]
②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은 사냥꾼이었습니다 [창 25:27-28]
③ 에서는 젊은 날에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창 26:29-34]
④ 그 결과로 나중에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분노한 사람이 에서입니다.[창 27:35-41]

자, 여기까지 보면 에서는 미래가 어두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사람 구실하면서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기는 틀린 사람! 그런데 성경은 에서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마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아주 밝고 배움직한 에서의 모습 몇 가지를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을 용서하는 에서의 행동입니다.
우선 야곱은 형 에서에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배고픈 형의 상황을 이용해서 형의 장자권을 탈취했습니다. 형이 무지하고 형이 그것이 무엇인지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할 때 먼저 그 장자권의 특별한 힘을 알게 된 야곱은 이 사실을 형에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형을 속이며 빼앗았습니다. 빼앗긴 장자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에서는 그렇게 당하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나이든 아버지 이삭이 유산상속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받았던 많은 축복들을 아버지 이삭이 누려왔는데 이제 그것을 대물림 해주는 순간에 당연히 자신의 것인 줄 알았던 축복들이 동생에게 넘겨지는 과정을 에서는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 이삭에게 효도를 한 것은 에서였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에게서 당연하게 상속을 암묵적으로 약속받은 사람은 에서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짜고 동생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아니 어쩌면 아버지 이삭마저도 자신을 버리고 야곱을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황당하고, 배신감이 느껴지고,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는 에서입니다.
자, 만약 여러분이시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산상속에서 제외되고, 자신을 무시하는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할까요? 참 묘한 일은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에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내 주지 않는 그 늙으신 부모님을 돌아가실 때 까지 모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신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한 동생 야곱을 그리워하며 삽니다.

욕심도 없고 원한도 없고 그냥 순진한 에서!! 절제 능력이 부족하고 기분에 따라 좌우되어 살기도 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기는 하지만 악의 없이 그냥 착한 형 에서!! 저는 이 멍청한 에서가 참 마음에 듭니다. 닮고 싶습니다. 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동생 야곱이 궁금해졌습니다. 만약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그는 매일 마다 하나님께 자신을 속이고, 버리고, 훔쳐서 달아난 동생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동생 야곱이 결혼을 해서 아이들도 있고 아내들도 있는 가장이 되었고, 가문을 이루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어서 낙타와 소와 양과 염소도 많이 있고 훌륭한 목축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반가운 소식은 그 야곱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서는 반갑기도 했지만 걱정도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험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도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악해져서 약탈하려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음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갑자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이 오는 것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보고 싶은 마음에 마중을 나가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기 전에 속히 가서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여성스러웠던 야곱이 아무래도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까이 있는 장정들을 모았습니다.
그 당시 에서는 아버지 이삭을 도와서 열심히 일을 해왔고 어느덧 한 부족의 부족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양도, 소도, 낙타도, 염소도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부유함이 있었습니다. 창대케 해 주마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후손들을 넉넉함의 복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중에 강도들과 맞서 싸울만한 사람들을 모아보니 어느새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에서는 서둘러 400명의 장정들이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낙타 등을 준비하고는 야곱을 맞으러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며칠이 걸려서 야곱을 만나자 그는 그리움에 야곱을 끌어안고 그만 눈물을 터뜨리게 됩니다.

[창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이러실 수 있으세요? 조건 없이 그를 용서하고 마음의 죄 짐을 깨끗이 털어버립니다. 그의 반응에 관계없이 내가 용서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그렇게 용서하셨듯이...

둘째는 에서의 양보입니다. 떠남입니다.
야곱은 긴 길을 돌고 돌아서 아버지 이삭에게로 왔습니다. 이미 야곱은 큰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에서도 부자이었고, 야곱도 넉넉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살아갈만한 충분한 땅이 그들 앞에 있었지만 왠지 그 땅이 야곱의 것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에서입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땅입니다. 고향이고 이곳에서 성공했습니다. 한 번도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고 이곳에서 벗어난 삶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자꾸 이곳을 야곱에게 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고 아버지 이삭의 뜻임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서는 대단한, 감히 어지간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엄청난 결심을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로 결심합니다. 힘으로 하면, 에서가 야곱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지역주민들이 투표를 해도 당연히 거의 에서에게 몰표가 나올 상황입니다. 이미 에서에게는 부인들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6장은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에서의 가족들 명단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에게는 3명의 부인과 5명의 아들들 그리고 11명의 손자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구며 살아온 곳이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지역주민들의 뜻보다도, 다수결에서 이기는 것보다도, 자신의 욕심보다도, 가족들의 생각보다도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결단합니다. 그 결심 후의 행동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창 36: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사랑하는 아들을 죄인된 우리들을 위해서 포기하시고 양보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 했다 라기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순종하는 에서의 모습입니다. 닮고 싶은 에서입니다.

그의 용서와 그의 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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