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으로부터 온 애절한 편지
아버님으로부터 온 애절한 편지
  • 민돈원
  • 승인 2020.11.0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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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주 전 고향에 계신 연로하신 아버님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어머니가 별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지난번에 이어 2번 척추 뼈가 골절되어 10월8일에 광주에서 시술하여 10일 집에 내려왔다. 앞으로 어머니는 일절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또다시 골절될 우려가 많으니 일을 피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들었다. 그래서 밭을 내년부터는 벌지 않기로 네 동생들과도 약속을 했다. 금년 김장도 하지 말라. 는 네 동생들의 간곡한 부탁이다. ⸱⸱⸱(중략) 나도 허리협착증으로 좋지 않지만 그래도 어머니보다는 나으니까 내가 밥도 하고 모든 것을 내가 다 해 나가야 할 가정형편이 되었다.

그러니 하는 말인데 내가 언젠가 너에게 간곡히 부탁한 것처럼 이제 너도 앞으로 은퇴하게 될 텐데 은퇴 후 집이라도 마련하려면 지금처럼 저축도 않고 헌금만 많이 하고 목회한다면 누가 네 장래를 보장 하겠느냐? 많이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헌금 좀 줄이고 저축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다 보아도 너처럼 장래를 소홀히 하는 목사님을 보지 못했다. 내 말을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깊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부탁이다.

10년 세월 내가 살아보니 금방 이더라. 네 동생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간곡히 부탁한다. ⸱⸱⸱”

아버님의 편지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다. 자식을 염려하는 마음이야 어느 부모님인들 이 같지 않으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부모님이 볼 때는 아이다. 게다가 주위에서 목회자들을 만나면 적지 않게 이런 얘기 하는 것을 보면 현실적으로 결코 틀린 말씀도 아니다.

아버님은 40여년간 오직 한 길 농촌에서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에 몸담고 계시다 오래 전 정년퇴임하시고 이후 고향에서 어머님과 함께 소일거리 정도 하실만한 밭과 논을 지으면서 고향 한번 떠나지 않으시고 평범하게 살아온 분이시다. 80중반 동갑내기인 부모님은 7남매를 낳고 키우시느라 무척 고생을 많이 하신 것을 보고 자랐다. 옛날 분이 대부분 그러듯이 장남에 대한 기대가 큰 전형적인 틀을 벗지 못하는 분이다. 하지만 장남으로서 부모님 곁에 있지 못하는 대신 몇몇 동생들이 나보다 부모님을 가까이서 잘 모시고 있어 그들에게는 한편으로 고맙지만 평소 미안한 마음이 많다. 목회한답시고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 못하고 있는 게 늘 마음에 걸린다.

아버님 말씀처럼 돈도 좀 모으고 사는 장남이어야 하는데 목사로서 이미 그런 것은 초월한 삶을 살고 있으니 걱정일 수밖에 없어 보이신 거다. 사실 저축도 없이 사례비가 다음 달 가기 전에 제로이니 한마디로 대책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목회하는 교회가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비교적 보장되던 한전을 다니다 그만 둔 후 목회의 길로 들어 선 이후로는 내 손으로 옷, 신발 등 개인 치장 해본 게 거의 기억이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지금 있는 건 대부분 오래전 은혜 받은 분들이 선물해 준 것으로 대충 살고 있다.

아내에게 결혼기념일 한번 제대로 챙겨준 적 없다. 27년 목회하는 동안 휴가 한번 가 본 적이 없는 목사다. 그렇다고 휴가비가 없어서 못가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휴가비를 책정해 줘도 다시 헌금하고 마는 스스로 보기에도 어리석은 별종의 목사다.

엊그제는 매일 신고 다니던 신발 앞쪽 바닥창이 낡아 떨어져 계단에 걸려 넘어졌다. 나중에 본드로 붙여 다시 신고 다닌다. 그러다 예배 때나 외출용으로 신고 있는 구두는 한 켤레밖에 없기에 평소 신고 다닐 신을 좀 저렴하겠거니 하여 “꼬끼오”라는 매장을 찾았다. 겨울나기 위해 실용적으로 신을 수 있는 편한 신발 하나가 눈에 들어와 구입했다.

지금도 심정적으로 아버님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내 목회 철학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쌓아놓고 사는 게 불편하다. 다 드려도 부족할 뿐이다. 어쩌다 외부에서 강사비나 사례 받으면 십일조가 아닌 거의 다 교회에 헌금하고 만다.

교회 공금은 단 만원이라도 아끼고 싶은 목사다. 그래서 합당하지 않고 불필요한 과다 지출은 반대한다. 그래도 책정된 몫이라고 받는 경우 교회 재정에 반납하고 만다. 남아도 다시 반납한다. 돈이 싫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성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조금이라도 교회재정에 플러스가 되고 싶어서다. 재정관리만 잘 해도 교회재정이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다가 교단을 움직인다고 하는 분들의 공금에 관한 불미스런 소식을 듣게 되면 ‘목회자의 세계가 이렇게 다르구나.’ 라는 생각에 상실감과 함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어지는 일이 한 두건이 아니다. 살아생전 아버님이 보내신 편지에 아니라고 대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수용하기도 힘든 나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 염려를 덜어 드리는 길이 있다는 희망의 줄을 놓지 않는 이유가 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남은 목회여정 노후걱정이나 하는 그런 신세로 전락하는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대신 끝까지 내 삶의 해답이요, 전부가 되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목사의 길 이외는 욕심 부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라는 소망의 기도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고자 할 때 바로 생명의 복음을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복음 그대로를 당당하게 선포함으로써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이 아직은 내게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 나아가 주님의 부르심 받는 그 날까지 쓰임 받고 인정받는 거룩하고 신실하며 충성된 목사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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