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열 여섯번째 이야기
큰나무 열 여섯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0.10.22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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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찾아든 계절성 알레르기는 인식 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코가 맹맹해지고 재치기가 나면 여지없이 가을은 시작 된다. 호전을 기대하고 먹은 한약과 양약은 종류와 그 량에서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강단에 서는 날이면 전날부터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 나만의 처방으로 대처하지만 그때뿐이다. 계절이 주는 의미를 깊이 음미할 겨를을 고약하기 이를 때 없는 알레르기에게 모두 내어주고 막힌 코로 멍하게 보내야하는 가을은 내게 최악의 시간이다. 갑자기 찾아든 추위에 알레르기가 잠시 물러갔다. 주변은 가을로 온통 물들어 있다. 넓게 펼쳐진 논들은 텅 비어 버렸고 율무 밭은 고라니가 숨어 지내던 흔적도 오간데 없이 앙상한 줄기만 남기고 수확을 마쳤다. 두어 주간 지나면 서리태 수확을 마지막으로 올 농사는 끝날 것이다. 멀리 있는 높은 산에서 아래를 향해 달려 내려온 단풍이 창문 밖을 성성이고 아침이면 무서리가 축축이 풀잎을 적신다.

올 가을은 계획에 없는 가을아리를 해볼 요량이다.

여름내 초록이던 이파리가 굳이 형형색색으로 단풍이 드는 이유는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다. 과학적 해답이 있지만 만족스런 답이 아니다. 숱한 시학적 해답도 싱거워진 나이에 홀린 듯 단풍이든 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인생의 가을도 올 가을 단풍처럼 아름다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월이 스친 자리마다 거친 흔적으로 곱게 물든 긴 그른 듯하다. 낡고 퇴색 된 잎마저 떨구고 나면 볼품없는 벌거숭이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것이 인생이다.

삼십 초반에 한아이 손을 잡고 갓 낳은 아이를 포대기에 안고 곡식창고보다 더 초라한 교회에 부임하여 23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은 자리 청년이 되었고 젊고 활력이 넘치던 교우들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들이 대부분인 날들은 한결같은 속도로 지나갔지만 돌이킴의 시간은 마치 가속이 붙은 무엇처럼 빠르게 지난 간 것처럼 느껴진다.

한때는 그토록 소중하고 중요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고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심각했던 외침도 메아리조차 없이 흩어져 버렸다. 만남과 헤어짐으로 간결 되는 사람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고 현실과의 연계성도 찾아지지 않는다. 소유의 만족이나 성취의 기쁨은 피식 웃음으로 넘기는 가치로 충분하고 공포나 모멸의 기억은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 기억처럼 가물거린다. 누군가 ‘신앙은 허무의 발견’이라고 했는데 평생을 난시로 살아온 나에게도 허무가 살아 있는 실체처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라지거나 흘러가버리는 시간의 강에서 영원을 건저 올리는 것이 인생인데 어리석고 게으른 자는 빈손이다. 때때로 찾아든 반성의 기회는 영악한 변명을 키우는 것으로 대신하고 표피적 삶을 단장하느라 영혼은 폐허로 변한지 오래다. 자신과 성도들의 삶에 남아있어야 할 설교는 컴퓨터 폴더 속을 떠나지 못하고 구원의 가치는 장날 난전에 헐값으로 내놓은 상품처럼 되어 버렸다. 투박한 인생으로 포장 되어야할 거룩한 삶은 인생의 허위를 가릴 뿐이다.

빈들에 눈이 내리고 살얼음이 맺히면 허무조차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가을을 야무지게 앓고 나면 알레르기도 사라지여나 코만 맹맹했던 것이 눈까지 흐려져 우울하고 슬프다. 달빛에 물든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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