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구원과 사회적 책임
영혼구원과 사회적 책임
  • KMC뉴스
  • 승인 2020.10.0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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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개인구원, 사회구원이란 말이 당시 뜨거운 이슈중의 하나로 첨예하게 대두되면서 교회와 세간에 회자된 적이 있다.

당시 대학가를 비롯한 거리시위는 연일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진통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 참여 문제에 대해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 의견이 분분하기 마련이었다.

그 때 일부에서는 '교회는 무엇 하느냐?'와 같이 격앙된 반감이 밖에서 들려오는 요구였고, 아니 교회 내부에서도 그런 갈등들이 없지 않았다. 그 때 등장한 단어가 바로 '개인구원', '사회구원'이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을 더 주장하고 나뉘어 대립하다 보면 교회가 보수니 진보니 하는 현상이 생기고, '사회 정의보다 개인에게 우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아니다, 사회참여로 정의를 외쳐야 한다.' 라는 식으로 주장하다보니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이분법적인 자신의 덫에 걸린 나머지 심지어 결국 갈리게 된다.

이는 마치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와 흡사한 논쟁과도 같다.

엄밀한 의미에서 서두에 언급한 이 용어들은 성경적이라고 보기 힘들고, 신학적인 용어도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 시대상을 반영하여 붙여진 부산물로 봄이 타당할 것 같다.

임성모 박사(웨슬리안조직신학연구소)는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웨슬리는 사회적 구원을 추구하지 않았다.'라고 잘라 말한다. 다만 '영혼구원을 추구하면서 변화받은 이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라고 제시한다.

따라서 두 단어-개인구원, 사회구원-를 다른 말로 바꾸어 사용한다면 개인구원은 '영혼구원'으로, 사회구원이란 말 대신 '사회적 책임'으로 사용해 봄직 하다.

이에 이 둘은 서로 양립되어야 할 요소이지 우선순위의 문제나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할 요소는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구원에는 관심 없고 사회적 책임에 따른 정의만 주장하는 경우 사회운동가로 명성을 낼지 모르지만 이런 일변도로 흐르는 자들의 특징은 냉혹하고 위험하며 종종 반교회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적지 않다. 이와 반면에 불의에 침묵하고 사회적 책임을 결여한 영혼구원만의 주장은 기복주의로 흐르거나 공교회성을 상실하여 역사성이 없다는 지탄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웨슬리안이라면 이 점을 명확히 분별한 줄 알아야 한다. 즉 복음에 입각한 영혼구원, 동시에 사명감을 가지고 사회적 불의와 절대적 가치, 거룩성을 무너뜨리는 악에 대해 얼마나 실천적 영성으로 책임 있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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