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의 사랑방,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가?”
언더우드의 사랑방,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가?”
  • 곽일석
  • 승인 2020.09.2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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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콜레라 퇴치운동으로 건축된 새문안교회와 맥길 선교사의 평양선교

새문안교회는 원래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비좁아져 1895년 새문안교회는 새로운 건물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새문안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대개가 교사, 목사, 농부, 상인 등이어서 한 달에 5달러 이상을 벌 수 없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건축비는 2천 달러가 나왔습니다.

한편, 그 해 여름 서울에는 무시무시한 전염병 콜레라가 돌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콜레라를 쥐병이라고 불렀는데, 증상이 쥐가 다리를 갉고 올라와서 가슴에 이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886년에 창궐했던 콜레라를 치료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선교사들은 다시금 한마음이 되어서 콜레라 퇴치에 나섰습니다. 제중원의 원장이었던 애비슨 박사가 총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언더우드도 그의 부인과 함께 이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형의 도움으로 1893년부터 서대문 밖에 콜레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보호소를 만들어서 운영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보호소를 중심으로 콜레라 퇴치 운동을 벌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인들로 구성된 자원 봉사단을 만들었고, 여기에는 언더우드가 섬기던 새문안교회 신자들이 많이 가담했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상당한 결과를 거두어, 얼마 가지 않아 콜레라는 수그러들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언더우드에게 미국 공사를 통해서 감사의 뜻을 전해 왔고, 선교사들에게 감사의 선물과 치료에 들었던 약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와 함께 봉사했던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한 보수를 지불했습니다. 조선인 신자들은 뜻하지 않은 거금을 만져보게 되었습니다. 새문안교회 신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받은 귀한 돈은 귀한 일에 쓰여야 한다며 교회건축에 헌금했습니다.

이로 인해 새문안교회는 가장 좋은 기와와 재료를 사용해서 한국에서 최고의 한식 건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전염병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선교사들을 도와 환우들을 위해 봉사자로 나섰습니다.

1895년 여름 당시 한양에는 엄청난 규모의 콜레라가 유행했습니다. 1886년 콜레라가 발생했을 당시 한양에서 6,152명, 100명 당 5명이 죽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지만, 선교사의 지침에 따른 사람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미신에 의존하면서 비위생적 방법을 따른 사람들은 대거 희생됐습니다.

10년이 지나 다시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기독교 병원을 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조정에서조차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가”라는 방을 곳곳에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다른 선교사들은 1895년 여름 발생한 콜레라를 퇴치하는 데 힘을 모았고, 서대문 밖에 콜레라 환자 보호소를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 위험을 무릅쓰고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자원봉사단으로 참여해 헌신적으로 백성들을 돌봤습니다.

그리고 맥길은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왔습니다. 애초에 북감리교 선교사업은 한국에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으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감리교회의 기초를 닦았던 스크랜튼 선교사가 1885년 9월 정동병원을 세워 의료사업을 시작했고, 하워드(M. Howard)의사, 셔우드(R. Sherwood)의사가 내한하여 일했으며, 이어서 1889년 8월 27일 맥길이 내한하여 스크랜톤이 창설한 병원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맥길은 한국에 파송된 4번째 남성 선교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착 다음해인 1890년 10월 상동에 있는 상동 약국이 상동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정식으로 파송 받아 본격적인 의료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맥길은 한국 북부지역의 선교에도 관심과 열의를 지니고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까지 선교여행을 하며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그는 1893년 3월, 함경도 원산에 정착해서 의료와 함께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며 선교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이런 그의 선교사업은 결실을 거두어 1896년에는 219명의 세례교인과 원입교인을 기록했고, 그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의료 활동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원산에 예배처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사업이 확대되자 하디(R. A. Hardie. M.D) 의사까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맥길은 원산에서 9년간의 선교사업을 마친 후 1898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한국에 와서 원산지방에서 선교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1902년 선교지역 분할 협정으로 원산지역이 남감리교회에 이양되자 맥길은 원산을 떠났습니다. 그는 원산서 정주지방까지 선교구역을 확장시켰고, 특히 1902년 평양지방에 콜레라가 휩쓸었을 때 평양까지 가서 3천여 명을 치료했습니다.

이렇게 맥길은 공주에 오기 전에 13년여의 한국선교 경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소중한 경험은 공주를 비롯한 주변 지역 선교와 논산제일교회 설립에서 긍정적인 효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맥길은 공주에 온지 2년여가 지난 1905년 다시 안식년을 맞아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1906년 4월 선교부의 정책 변경으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한국에 귀환하지 않고 레드랜즈(Redlands)에서 성경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18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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