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열 세 번째 이야기
큰나무 열 세 번째 이야기
  • 이형연
  • 승인 2020.09.10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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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뜨거운 열정의 시간이 있다. 나에게도 햇수로 20여년을 더듬어 올라가면 열정으로 뜨거운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주저하는 일도 일단 저질러 놓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신중한 선택과 언행이 필요했어야할 일들을 쉽게 격정에 휩쓸려 결정해 버릴 때가 많았다. 열정이 도를 넘으면 무모해 진다.

교회에서 직선으로 2키로 되는 지점에 댐을 건설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내가 사는 곳이 댐의 하류면 최소한 교회가 물에 잠기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별 반응 없이 지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은 온통 술렁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댐 건설을 찬성하는 부류와 반대하는 부류로 양분 되어 서로 간에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들고 있었다. 한마을에서 평생을 함께한 이웃이 순간에 원수처럼 으르렁대며 싸우는 모습은 당황 그 자체였다.

마을이 자중지란의 몸살을 앓고 있는 사이 댐건설은 구체화 되어 군에 건설 특위가 만들어지고 수자원공사는 댐건설 사무소를 읍내에 보란 듯이 간판을 내걸었다. 어찌 알았는지 투기꾼들은 수몰 지구에 땅을 사드려 값나가는 과수들을 심어 보상 가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교회보다 더 댐 예정지 가까이 있는 이웃교회의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그는 댐 반대 입장이 분명 했다. 나에게 함께 반대 운동을 하자고 제안을 해 왔다. 나는 별생각이 없다고 얼버무려 그를 돌려보냈다. 그날 저녁 많은 생각이 잠을 청하지 못하게 방해 했다. 침묵은 비겁하고 반대운동은 부담스러웠다. 아내가 몸을 푼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옆에서 돌봐 줘야한다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지만 이것은 최후의 카드이고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태어난 아이는 나를 보면 방끗방끗 웃기 시작했고 난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이가 건강하게만 자리길 기도하며 하루 종일 아이에게 매달려 보냈다. 문득 아이가 자리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내게 물음을 던지는 시기가 오면 오늘의 나의 삶을 물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 있게 살지 못한 아비를 아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웃교회 목사님을 찾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구했다. 그리고 일 년이 넘게 거의 주일을 빼고 댐 반대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이 무모한 열정은 아내와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시간을 만들고 말았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밤늦게 집에 들어가서는 자고 일어나 다시 신문 보도 자료를 쓰고 환경 단체나 반대 집회에 참여하는 일과로 시간을 채웠다.

반대운동의 성과는 성공적이어서 정부의 공식 발표로 백지화 되었고 나는 삶의 자리로 돌아 올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의 크고 작은 부잇 긴 일들로 인해 그곳에서의 목회적 삶을 지속하긴 어려워 졌다. 아이와 교회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송한 마음이 두고두고 나를 괴롭게 했다.

그때 나를 열정으로 이끈 것은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가정과 교회를 튼실하게 세우지 못한 빈약한 변명이었다.

사람은 그렇게 정의롭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나만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생각이 짙어진다. 댐건설이 백지화 되었을 때 그동안 빨갱이 목사 잡어 넣으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은 금 새 동강지킴이가 되어 이권이 있는 구간을 점유하고 나셨다. 중국의 경극을 보듯 순간에 얼굴을 바꾸는 자들의 모습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그들에게 사상이 불온한 자였다. 단지 양심과 열정에 이끌렸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걱정과 분노의 대상자가 되었다.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은을 다라 준 자가 내가 아닐까. 이익이 없는 것에 열정을 타우는 바보가 아닐까. 시작도 그러 했지만 돌을 던질 타임에도 많은 생각들이 교차 되었다.

교우들과 가족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그런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용납해준 그들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나의 반성의 언어는 이것이다. 자신을 일깨우는 신앙의 가치가 숙고 된 사고를 거쳐 삶을 통해 실천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열매를 맺어야 진정한 신앙인 일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장 되거나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와 편향된 시야로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려는 오만의 사슬을 끊고 서야 신앙이 바로 설수 있다는 다짐은 내게서 기인되지 않은 생각이 분명하다.

큰 바람이 지나간 산이실 골짜기로 무수한 별빛이 쏟아진다. 산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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