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드림과 못 드림의 차이
안 드림과 못 드림의 차이
  • 민돈원
  • 승인 2020.09.0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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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당시 사회가 혼란할 때 교회의 갈등을 굳이 지적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갈리었다. 그것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문제로 인한 입장차였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민주화 투쟁을 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측면에서 영혼구원에 주력하기 위해 오히려 더 활발하게 캠퍼스 내에서나 국내 국외 선교에 열정을 쏟음으로써 교회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성장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약간의 논란이 없지는 않았지만 교회 자체끼리 심한 요동은 없었고 더욱이 교회 예배가 무시된다거나 교회가 비난세력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금년 2월부터 전 세계의 정세, 즉 사람들의 생활습관, 나아가 의식구조까지 어쩌면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고 할 수 있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우한 폐렴의 다른 이름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괴력이다.

무엇보다 각종 사회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교회를 들여다볼 때 상황은 80년대 치열했던 국내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 결정적인 혐오대상으로 슬프게도 프로테스탄트를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도 방송과 언론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도 힘 있는 세력들에 편승하여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예컨대 지난 8.28 일간지 3곳에 경기지역 교회 연합체인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명의의 정부의 비대면 예배 조치는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 위반이자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기존 드려왔던 예배를 드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부산기독교총연합회도 부산지역 16개 구군 기독교연합회와 소속 1천800여 지역 교회에 비대면 예배 거부를 촉구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 예배금지에 따를 수 없음을 밝혔다. 교계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연합 역시도 대표회장 명의로 소속 교단과 교회에 문자를 보내 "우리는 생명과 같은 예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거센 반발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친정부적인 NCCK나 기독인들 가운데서도 일부 특정 교회를 제물로 삼아 "진리와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가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가 되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자책하는 비난과 질책을 쏟아 놓는 등 지금까지 계속 팽팽한 시소게임을 그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외부로부터 받는 많은 비난도 문제거니와 무엇보다 큰 문제는 한국교회 대부분 교단장들의 거룩성 상실과 온갖 흠집으로 인한 영적지도력 상실에 있다. 동시에 교회 자체 안의 영적 지도력의 부재 또한 오늘의 사태를 힘들게 하는 주요요인으로 꼽지 않을 없다. 그리고 여기에 예배에 관한 복음적인 신학배경이 결여된 까닭에 맹목적인 굴종으로 이어져 버렸고 사분오열되어 교회 안에 파열음만 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는 예배에 관한 한 현재 정부의 강제 명령 앞에 하나의 결단을 계속 해야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예배를 강압에 견딜만한 힘이 없어 스스로 알아서 안 드리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심한 방해와 앞으로 이어질 제지 속에서 못 드리는 교회의 차이다.

교회에 예배드리러 온 교인가운데는 아예 외출을 하지 않다 예배만 드리러 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확진자가 될 리는 거의 희박하다. 우리교회의 예를 들어보아도 그런 사람은 없다. 그리고 연로한 분들은 본인이 우려하여 알아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예배드리러 온 사람가운데 한 주 내내 동선을 살펴보니 어느 날은 백화점에, 또 어느 날은 음식점에, 그리고 또 다른 날은 오랜 시간 병원이나 은행에 머문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렇게 동선이 겹친 사람가운데 교회 예배를 온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이 사람이 만의 하나라도 확진자가 되었다고 해서 교회 예배 드렸기 때문에 교회발이라고 언론이 보도를 하고 정부가 발표를 한다면 얼마나 불공평하고 부당한 일이겠는가? 이런 사람을 향해 ‘왜 이럴 때 정부시책에 따르지 않고 예배 드렸느냐?’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왜 이렇게는 보도를 안 하는가? ‘왜 이럴 때 백화점을 갔느냐?’ ‘왜 하필 이럴 때 음식점을 갔다 왔느냐?’ ‘왜 병원을 갔느냐, 은행을 갔느냐?’ 라고 말이다. 그런 동선이 겹쳤으면 ‘00백화점발, 00음식점발, 00병원발, 00은행발’ 중 하나라고 해야 정부 발표를 납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못하기에 이것을 두고 교회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는 악한 자들의 하나같은 전략이라고 이 시대 깨어있는 자들은 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에 대해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두 가지를 결단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본다. 그것은 예배를 스스로 알아서 안 드리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못 드리는 교회이다. 스스로 협조한다면서 안 드리는 것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생명과도 같은 예배를 드리다 강제 폐쇄내지는 공권력에 의해 강압에 못 이겨 못 드리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는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는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존 캘빈이 '국가론'에서 다루고 있듯이 정부의 명령이 하나님 명령에 위배되는데도 정부 명령에 굽혀버린다면 그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과 같음을 잊지 말자.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들이다. 그것을 예배드림으로 그 말씀을 사람 두려워하지 않고 어느 시대든지 막힘이 없이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카페에서, 학교에서, 법원에서, 공연장에서, 경기장에서 만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죄인임을 고백하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하는 곳에서 신앙의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루어 언약한 자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이다.

이것이 세상 사람에게는 바이러스 온상인 것처럼 비난거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배드리다 박해받는 선교지에서 또는 북한에서 순교당하고 감옥에 갇힐지라도 막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정작 코로나는 내 영혼을 망가뜨릴 수 없다. 반면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새 삶을 살게 만들게 하는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예배이기에 강제력으로 못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나 안 드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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