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차원에서 하나의 조화된 기독교대한감리회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큰 차원에서 하나의 조화된 기독교대한감리회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 곽일석
  • 승인 2020.05.28 2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감리교회의 정신은 성서적인 구원의 삶을 추구하면서도 개방적이고 에큐메니칼한 넓은 마음이었습니다.

한국감리교회, 혼돈과 좌절의 종교단체로 전락해 갈 수도 있는 기로에서, 개화기 ‘대도대기(大道大器) 패러다임’의 비전을 기초로 희망의 새 길을 열어내고자 합니다. 새로운 역사 창조를 향한 카이로스의 시기에,  [2030 메소디스트 포럼] 제8차 정기모임을 개최하고 한국감리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또 한 세기 희망의 지평을 환하게 밝히고자 합니다. 한국감리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또 한 세기 희망의 지평을 환하게 밝히고자 합니다.

▮일 시 : 2020년 6월 15일(월) 오후 2시, 수원성교회(담임 임일우 목사)
▮주 제 : 코로나19 사태 전후의 우리사회와 목회현장의 방향

1.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한 목회현장의 고민과 대안 모색 - 원종윤 목사(동광교회)
2. 초기 선각자들의 빛에서 바라본 한국감리교회의 미래 - 성백걸 교수(백석대학교)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새날이 밝았습니다. 1930년 12월 2일 화요일 오전 10시, 냉천동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두 교회의 총회대표 비롯하여 여러 내빈 등 10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오전에는 예배와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오후 모임에서 전권위원회를 대표하여 새 교회는 진정한 기독교회와 참된 감리교회와 실제로 조선교회가 되어야한다는 웰치의 진술에 있었습니다.

이어서, 기독교조선감리회가 건설되는 성명서를 선언하였습니다. 합동전권위원회 회장 웰치감독이 영문으로, 부회장 윤치호씨가 조선문으로 낭독한 후, “이로부터 시작하여 조선감리교회가 탄생됨과 재래 두 조선 연회는 폐지됨을 선언한다.” 는 “역사적인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는 조선감리교회가 새로 살아 있게 되었습니다. 북감리교회의 선교가 시작된 지 45년, 남감리교회의 선교가 시작된 지 3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12월 3일(수)에는 총회 진행을 위한 각 부 위원 선정, 4일(목)은 12월 7일을 총회주일로 정하고 교리적 선언에 대하여 토의, 5일(금)은 교리적 선언 채택과 총라사제 결정, 6일(토)은 합동축하식과 서울 시내 행진, 7일(일)은 정동교회에서 창립기념예배, 8일(월)은 양주삼 총리사 선출, 9일(화)은 중앙협의회 위원 선택, 10일(수)은 총리사 취임식 거행, 11일(목)은 총리원 설치안 통과, 마지막 날인 12일(금)은 교회예문 위원과 장정편찬위원과 각 국 위원과 감.장 양 교회 합동연구위원을 선정하고 11일 간의 창립총회를 폐회하였다.

합동된 직후 감리교회의 교세는 서부연회 6개 지방, 중부연회 11개 지방, 동부연회 6개 지방, 만주선교연회 2개 지방에 남. 여 교역자 567명, 교인 총수 58,562명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합동의 전 과정을 통해 조선감리교회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조율한 전권 및 특선위원들의 역사적인 성격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떤 면에서 감리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고, 그들이 대변한 두 감리교회의 소리는 어떤 소리였을까?

사상적으로, 당시 감리교회는 초기부터 형성되어 내려오던 다섯 가지 유형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곧, 한국역사에 새로 들어온 “복음”이 교회현장으로 퍼지면서 복음선교를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의 교회운동 사상이 있었고, 지도력 양성을 추동하면서 복음적 자유주의의 신학운동사상이, 조선민족과 만나면서 사회적 민족운동사상이, 한국 종교문화와 만나면서 토착적 종교신학 사상이, 한국 여성현실과 만나면서 여성해방 기독교사상이 형성되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사상은 상호 배타적인 대립이나 갈등보다는 보완과 조화의 “대도”(大道)정신에서 전체 감리교회 사상과 성격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경에서 볼 때, 교회를 중심으로 영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결코 한국문화와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김종우, 오기선, 오화영, 정춘수, 변성옥, 민족의 운명과 사회개혁에 관심하면서도 역시 복음선교에 무관심하지 않았던 윤치호, 신흥우, 홍병선, 이만규, 최재학, 김득수, 신학운동에 관심하면서도 교회현장을 외면치 않았던 양주삼, 김영섭, 김인영, 변성옥, 복음선교와 한국여성의 평등한 지위향상을 위해 애쓰던 김폴린, 윤귀련 등은 각기 자신들의 배경과 관심을 반영하면서도, 큰 차원에서 하나의 조화된 조선감리교회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감리교회의 신앙유형으로 볼 때, 복음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유형과 진보적인 사회참여 유형과 토착적인 사상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다. 양주삼, 김종우, 오기선, 오화영, 정춘수, 김인영, 김영섭, 김폴린, 윤귀련 등이 첫째 유형에, 윤치호, 신흥우, 홍병선, 이만규, 최재학 등이 둘째 유형에, 변성옥이 셋째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은 모두 한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조선의 구원을 위하여 서로 인정하며 협력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감리교회 안에 보수적이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신앙유형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신적으로, 그들에게는 한 결 같이 합동을 위한 공통된 의식이 고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공유한 공통된 터전과 전망을 지니고 있었는데,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는 확고한 터전과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조선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뚜렷한 전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 기독교인”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같은 형제자매라는 정신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허물고 평화와 기쁨의 하나 된 세상을 회복한 구원자(엡 2:14)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너희들도 하나가 되라(요 17:21)’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부탁을 지상명령으로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처음부터 감리교회를 형성시키며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최병헌 목사의 구원이해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한국감리교회 구원신앙의 한 공통된 특징의 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편협하게 폐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초기부터 노병선, 최병헌, 전덕기, 김창식, 양주삼을 통해 개척되었던 동서양의 하늘을 아우르고 너와 나의 편협함을 넘어 대동단결 할 수 있게 하는 하늘의 큰 도 곧 그리스도의 대도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감리교인”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감리교회의 한 형제라는 우애심에서 우러나오는 협력으로 초기부터 함께 일해 온 그들이었습니다.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정신은 형식이나 문자보다는 성서적인 구원의 삶을 추구하면서도 개방적이고 에큐메니칼한 넓은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한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민족에 비해 같은 피와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는 한 민족이 바로 조선민족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 교회로 힘을 합쳐 한 조선에 한 하나님나라를 건설해야한다는 한 길로 함께 손을 잡고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